남비엣을 세우다

2021. 5. 10. 12:07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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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는 선정을 베풀어 백월족의 민심을 다스렸고 농업과 교통을 발전시켰다. 조타도 중국 본토가 평화로웠다면 새 정복지의 한 부분을 다스리며 관료로서의 출세를 꿈꾸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절대 권력자인 진시황이 죽고 못난 아들 호해(胡亥)가 황제의 자리를 가로챈 뒤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승과 오광이 농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자 삽시간에 수십만의 무리가 그 아래 모여들었다. 비록 진승과 오광은 몇 달 만에 진나라군에 진압됐지만, 천하 각지에서 반란군이 들고 일어났다.

 

이 무렵 남쪽에서도 생존을 위한 이합집산이 벌어졌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임효가 병이 들자 조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군대를 일으켜 중원과 이어진 길을 끊고 스스로 방비하여 제후들이 일으킨 변고에 대비하려 마음먹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이 들어 이처럼 깊어지게 되었다.

 

우리 땅은 뒤로는 험한 산세를 등지고 있고 앞에서는 남해가 가로막고 있다. 또 동서로 수천 리에 뻗어 있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적지 않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고 있으니, 이 또한 한 지역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세울 만하다.

 

군에 있는 관리들과 이런 일을 함께 의논할 수 없어 공을 불러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조타에게 남해군의 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했다. 임효가 정말 그렇게 말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역사가 승자인 조타의 주장만을 기록해놓았으니 믿는 도리밖에 없다.

 

임효가 죽자 조타는 즉시 남해군 곳곳에 격문을 돌려 도적떼 같은 군대가 장차 들이닥칠 테니 빨리 도로를 끊고 병사를 소집해 각자 지키도록 하라로 포고했다. 그리고 진나라가 임명한 각지의 관리들을 여러 가지 죄명을 씌워 처형했다.

 

남해군 관리들 상당수가 불과 얼마 전까지 어깨를 겯고 함께 싸웠던 전우들이었지만, 조타는 그들을 제거하는 데 하등의 망설임도 없었다. 구질서가 무너진 뒤 누구나 기회가 주어지면 낚아채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먼저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진나라가 유방과 항우에 의해 멸망하자, 조타는 곧바로 계림군과 상군을 공격해 합병한 뒤 나라 이름을 남비엣(南越) 수도는 현재의 광저우(廣州)인 번우(番禺)로 정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중국을 통일한 뒤 여세를 몰아 북쪽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 뼈저린 참패를 당한 한나라 고조 유방은 그 충격과 손실 때문에 찌에우다(조타)를 진압할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수가 없었다. 한나라는 하는 수 없이 그를 왕으로 봉해 형식적인 군신관계 안에만 묶어두려고 했다.

 

한 고조는 충직한 측근인 육고를 남비엣에 사신으로 보내 찌에우다에게 직인을 내리고 남월왕(南越王)에 봉했다. 기원전 196, 즉 백등산 전투에서 흉노에게 대패한 4년 뒤의 일이었다. 육고가 남비엣 궁궐에 도착하니 찌에우다는 방망이 모양의 이상한 상투를 틀고 두 다리를 벌린 채 앉아서 그를 맞이했다.

 

육고는 찌에우다의 무례에 준열히 항의했다. “왕께서는 중국 사람인데 지금 의관을 내팽겨친 채 보잘 것 없는 월나라 관습에 따라 천자와 맞서려 하시니 장차 화가 미칠까 염려스럽습니다. 만약 이런 행동을 한나라 조정이 알게 되면 10만 대군을 내어 이 나라를 공격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 사람들이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손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입니다.”

 

잠재 적국의 수도에서 그 왕의 목숨을 운운하며 신복을 요구하는 것은 죽음마저 각오한 담대한 행동이었다. 찌에우다는 그제야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육고를 맞았다. “내가 오랑캐들 속에서 오래 살다 보니 예의를 완전히 잊었소.” 찌에우다의 말이다. 사과인 듯하지만,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남비엣인이라는 반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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