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9. 08:57ㆍ카테고리 없음
타잉화에 머물러 있던 레러이는 승전보 속에 탕롱 인근으로 본진을 옮겼다. 레러이가 탕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성 밖에 주둔하고 있던 방정 장군의 마지막 부대마저 수비를 포기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탕롱성은 외부와 고립되게 되었다.
레러이는 탕롱을 포위하는 한편 인근의 박닌 푸토 남딘 등 크고 작은 성들을 모조리 공격해 점령했다. 베트남의 정치 · 경제 중심지인 홍강 유역 통제권까지 이제 레러이가 장악하게 되었다.
패색이 짙어진 왕통은 레러이에게 협상 의사를 밝혔다. 레러이가 쩐왕조를 복위시키면 철군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당초 명의 베트남 침략 명분이 호뀌리의 왕위 찬탈을 징벌한다는 것이었으니, 쩐왕조를 다시 세우면 명나라군이 물러가도 크게 체면을 깎이지 않을 법도 했다.
레러이는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베트남 백성과 중국 병사들을 지키자”며 화답했다. 그로서도 더 이상의 유혈사태나 확전 위험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게 없었다.
레러이는 서둘러 남쪽 하띤에 숨어살던 쩐왕조 8대 황제 예종의 3대손인 호옹(胡翁)을 찾아내 쩐까오(陳暠)라고 개명시켜 이름뿐인 왕으로 세웠다.
왕통과 레러이가 보낸 사신들이 베이징을 오가면서 명나라 조정도 쩐까오의 왕위를 인정했다. 레러이는 탕롱에 대한 포위를 풀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통의 휴전 제의는 전력 재정비를 위한 위장술에 불과했다. 레러이의 사신이 왕통의 사신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다가 왕통이 지원군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를 보고 받은 레러이는 휴전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탕롱 포위를 다시 강화했다. 그리고 각 지역에 관리들을 파견하고 과거를 실시하는 등 왕국의 통치를 개시했다.
레러이는 병사들에게 엄한 군령을 내려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했다. 그의 군대는 보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약탈에 의지해야 하는 반란군이 아니라 이제 제도와 국가 동원 체제의 뒷받침을 받는 국군이었던 것이다.
패전의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난 왕통 총병관은 국면 전환을 위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1427년 3월 방정 장군이 기병대를 이끌고 탕롱성을 박차고 나가 서쪽 투리엠에 주둔 중이던 베트남군을 습격해 리찌엔 장군을 죽이고 도비 장군을 사로잡았다.
다음 달에는 왕통이 직접 병사들을 끌고 나가 탕롱 남동쪽 탄찌를 공격했다. 레러이가 딘레와 응우옌씨 장군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지만 딘레는 전사하고 응우옌씨는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탈출했다. 이 전투로 명나라군은 아직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과시하며 사기를 회복했다.
레러이는 보복으로 탕롱에 대한 식량 반입을 차단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군대를 보내 명나라군이 주둔하고 있던 응에안성을 함락시켰다. 일련의 전투 속에 양측은 또 한 번의 대규모 충돌이 불가피함을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