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전투 1) 명장 유승이 온다

2021. 7. 30. 07:42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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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통의 패전 보고를 받은 명의 선덕제는 기가 막혔다. 천자가 그만하자는 전쟁을 신하들이 강변해 끌고 가더니 애꿎은 수만 병사들의 목숨만 희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 베트남에서 손을 들고 나온다면 대제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주변 이민족들이 명나라를 업신여겨 다른 마음을 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명 조정은 가능한 최대 병력을 긁어모아 15만 명을 다시 베트남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군량 징발이 여의치 않아 광서성과 광동성에 별도의 관리를 파견해야 했을 정도로 명나라로서도 큰 부담을 안는 원정이었다.

 

중국 장군 석장 (사진 출처 pixabay)
중국 장군 석장  (사진 출처  pixabay)

새 원정군의 지휘는 안원후(安遠侯) 유승(柳升)이 맡았다. 그는 베트남 정복에 공을 세워 제후의 반열에 올랐고, 영락제의 오이라트 정벌 때 화총부대를 이끌어 대승을 견인했으며, 동쪽 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산동성에서 기세를 올리던 여성 반란 지도자인 자칭 불모(佛母) 당새아(唐賽兒)의 난을 기병대를 이용해 평정하는 등 당대의 명장으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그가 10만 대군의 본진을 이끌고 광서성에서 출발해 남서진하고, 운남성에 주둔하는 목성(沐晟)5만 병력이 남동진할 예정이었다. 두 부대는 레화에서 만나 포위된 탕롱성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탕롱의 왕통에게는 명 천자가 칙서를 내려 성을 굳게 지키며 유승을 기다리도록 지시했다.

 

명의 대군이 다시 몰려온다는 소식에 베트남군은 아연 긴장했다.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놓고 지휘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탕롱성의 명나라군이 더 적고 지쳐있으니 얼른 점령해 성벽을 사이에 두고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의견과 북쪽에서 내려오는 명나라군을 야전에서 요격하자는 의견이 엇갈렸다. 레러이는 격론 끝에 유승의 지원군과 먼저 싸우기로 결론 내렸다.

 

탕롱성 공격에 치중하다 실패하고 자칫 15만 대군이 아무 저지도 받지 않은 채 남하해 베트남군 뒤에 나타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응우옌짜이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레러이는 탕롱에 대한 포위를 유지하되 주력 부대를 모두 빼내 유승이 내려오는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베트남군 총병력은 의병들의 대거 합류와 징병으로 30만 명이 훨씬 넘었지만, 이들 중 충분히 훈련을 받고 전투 경험을 쌓은 정예병은 많아야 5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이들이 전장에서 소멸된다면 나머지 병사들은 명나라 정규군에게 무자비하게 살육당할 운명에 놓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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