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전투 3) 쓰엉지앙 전투

2021. 8. 1. 11:39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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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병력을 소모시키려고 매복 작전을 펼쳤던 베트남군은 적장의 사살이라는 기대도 안했던 초대형 전과를 거두었다. 토끼를 잡으려고 펴놓은 그물에 범이 걸린 것이다.

 

반면에 명나라군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형국이었다. 주력부대가 허겁지겁 쫓아왔지만 이미 유승을 비롯한 다수의 장군들이 전사한 뒤였다.

 

혼전 중에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으며 명나라군은 부사령관 양명(梁銘) 장군의 지휘로 겨우겨우 치랑 협곡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남행길을 서두르던 명나라군은 닷새 뒤 껀쩜에 매복해있던 베트남 3만 대군의 공격을 받아 2만 명 이상이 죽거나 포로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전투에서 양명 부사령관마저 목숨을 잃었다.

 

이제 명나라 지원군의 지휘는 도독 최취(崔聚)의 손에 맡겨졌다. 최취는 영락제의 정난지역에 가담한 공신의 한 명으로 황제와 함께 몽골원정에도 참전한 노장이었다.

 

그러나 영주(英主)인 영락제의 전략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능숙했을 뿐 스스로 대군을 이끌어 전투를 주도한 경험이 없었으며 낯선 땅에서 적에게 쫓기는 행군은 더더군다나 처음이어서 최취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여기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베트남군이 사흘 뒤 포깟에서 또 명나라군을 급습했다. 상서(尙書) 이경(李慶)이 싸우다 힘이 다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한 번 더 큰 타격을 입었다.

 

1427년 쓰엉지앙 전투
1427년 쓰엉지앙 전투

최취는 남은 병사들에게 조금만 더 가면 쓰엉지앙 성이 있으니 그곳에 들어가 안전하게 쉬며 전열을 가다듬자고 독려했다. 그러나 겨우 도착한 쓰엉지앙 성문 위에는 레러이의 군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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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취는 하늘이 막막해졌다. 어떻게 해야 자신과 이제 7만 명 남짓으로 줄어든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군대를 돌려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천자의 명으로 일으킨 대규모 원정을 현장 지휘관의 판단으로 중단했다가 어떤 문책을 당할지 몰랐다.

 

수비군에 비해 몇 배나 되는 병력을 총동원해 쓰엉지앙 성을 공격할 수 있었지만, 그러다 단기간에 성을 점령하지 못하면 명나라군 외곽을 베트남군이 다시 에워싸 이중 포위망에 갇힐 위험이 있었다.

 

베트남의 강
베트남의 강

쓰엉지앙성을 무시하고 강을 건너 최대한 신속하게 탕롱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고민했다. 트엉 강은 좁은 곳은 폭이 100m도 채 되지 않아 뗏목으로 다리를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강 과정에서 베트남군 공격에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임시 다리도 화공이나 수군의 충돌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최취는 그 자리에 멈춰 누군가 구원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가장 소극적인 결정을 내린 것인데, 이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명나라군은 트엉 강변의 논밭에 방어진을 세웠다. 다음 날 아침부터 멀리 베트남군 병사들이 띄엄띄엄 보이기 시작하더니 며칠 만에 각지에서 몰려든 베트남군이 명나라군 진영을 새까맣게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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