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전투 4) 무너지는 명나라군

2021. 8. 2. 10:06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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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취는 운남총병관 목성(沐晟)에게 가장 큰 기대를 걸었다. 목성은 5만 대군을 이끌고 레화 관문에 도착해 있었다.

 

목성은 명나라 개국공신인 아버지 목영 장군에 이어 운남을 반독립 상태로 지배하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직접 관리가 어려운 이 변방을 목씨 집안에 맡기고 대신 가족에게 벼슬을 주어 인질로 수도에 잡아두었다.

 

목성도 베트남군에 승리하기를 원했지만 이를 위해 자신의 병사들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만약 막대한 인명피해로 운남의 민심이 흔들리면 자신의 지위도 보장받기 힘들었다.

 

사진 레러이 석상
레러이 석상

이 같은 상황을 토대로 레러이는 목성이 유승의 전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쩐반과 팜반싸오 찡카 응우옌친 레쿠엔 등 쟁쟁한 장군들을 보내면서도 절대 접전하지 말고 대치 상태를 유지하라 신신당부했다.

 

목성에 맞선 베트남군은 화려한 군기 아래 각종 병장기로 방어진을 꾸렸지만, 사실은 병사들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곡괭이 대신 창만 든 농민에 가까웠다. 이를 알 턱이 없는 목성은 최취의 다급한 사정을 듣고서도 적의 방어진을 돌파하고 곳곳에서 가해져 올 매복 공격까지 극복해가며 쓰엉지앙으로 진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탕롱성에 고립된 왕통은 더욱이 성을 떠나 장거리 진군을 할 생각이 없었다. 황제가 사전에 칙서를 보내 탕롱성을 굳게 지키며 유승을 기다리라 지시했으니 황명을 핑계로 댈 수도 있었다. 왕통은 최취를 구하러 성 밖에 나가 싸우거나 이를 위해 인근의 베트남군이 어떤 상태인지 살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쓰엉지앙성에서 가장 가까운 요새는 트엉강 건너 남동쪽의 치린성이었다. 베트남군은 이마저도 점령한 뒤 포로 몇 명을 최취의 진영으로 보내 함락 사실을 알렸다.

 

명나라군 병사들을 점점 더 좌절에 빠졌다. 응우옌짜이는 편지를 보내 명나라로 돌아가라고 회유했지만 최취의 입장은 완강했다.

 

포위 10여 일 뒤 베트남군은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자 총공격에 들어갔다. 베트남군은 울부짖는 코끼리들을 앞세워 명나라군 진영을 들이친 뒤 병사들이 짧은 중국어로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인다는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명나라 병사들은 혼전 중에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격렬하게 저항하다 전사했다. 최취 도독도 전투 중 붙잡혔지만 베트남에 굴복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지키다 처형됐다고 중국 측 사서는 기록했다.

 

다음은 목표는 목성의 운남주둔군이었다. 응우옌짜이는 레화에 있던 목성에게 편지를 보내 유승이 이끌던 10만 대군의 전멸 사실을 전했다. 예상대로 목성은 즉시 진영을 거두어 철수했다.

 

목성의 군대 뒤로 쓰엉지앙에서 돌아온 베트남 주력군이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운남 국경이 바라다보이는 라오까이에서 일제 공격을 가했다.

 

명나라 병사들의 머릿속에 이제 저 언덕만 넘어가면 추격에서 벗어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가득 차면서 그동안 어렵사리 유지해오던 방어진형이 무너졌다.

 

베트남측 사서들은 이 전투로 명나라 병사 1만여 명을 죽이고 1만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천여 필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목성은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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