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대신 화해로 끝맺은 전쟁

2021. 8. 3. 10:32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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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러이는 포로로 잡은 명나라군 장군 몇 명을 탕롱성의 왕통에게 보내 명나라에서 오던 지원군이 모두 와해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은 왕통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최후의 기습공격을 감행했지만 수많은 병사들만 잃고 말았다.

 

베트남군은 방벽으로 탕롱성 밖을 에워싸 왕통과 명나라군 병사들을 더욱 절망감에 빠뜨렸다. 왕통은 어찌할 바를 묻는 밀서를 베이징에 계속 보냈는데 모두 중간에서 빼앗겨 절박한 성내 사정만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레러이는 왕통에게 계속 항복을 권유하다 상황이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시점에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성 안에 들여보냈다. 왕통이 산수와 마기 장군 두 사람을 베트남군 진영에 인질로 보내 화답하면서 본격적인 강화회담이 시작됐다.

 

레러이와 응우옌짜이는 왕통에게 일방적인 항복을 강요하는 대신 명분을 세워 철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14271122일 탕롱성 남문에 제단을 세우고 양군이 종전 행사를 열었다. 왕통이 명나라군과 관민의 완전 철수를 맹세했고, 레러이는 철수 인원의 안전을 약속했다.

 

20년 넘게 저질러진 명나라의 학정은 베트남 백성들의 가슴에 깊은 원한으로 새겨져 있었다. 많은 베트남 장군들이 울분을 토하며 퇴각하는 명나라군을 섬멸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러이는 약속대로 화의를 추진해야 한다는 응우옌짜이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고통스럽더라도 복수 대신 화해가 궁극적인 국익이라 믿었던 것이다.

 

명나라 군대 (사진 출처 Wikimedia)
명나라 군대  (사진 출처  Wikimedia)

명은 육군이 먼저 출발하고 해군이 뒤를 이었다. 레러이는 육로로 돌아가는 자들을 위해 길옆에 식량을 준비해 두었고, 바닷길을 이용하는 자들을 위해 배 500척을 제공했다. 이때 베트남을 떠난 명나라 군인과 관리 가족들 수가 86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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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베트남 땅을 벗어났지만 철수한 장수들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황제인 선덕제는 왕통에 대해 멋대로 적과 내통하였으며 조정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성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은 인신(人臣)의 예()가 없다고 질책했다.

 

그리고 왕통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문무 신하들이 일제히 그들의 죄를 밝히라고 상주했다. 조정에서 국문이 벌어졌고, 왕통과 진지 방정 산수 마기 등 주요 지휘관 전원에게 사형과 재산몰수가 선고됐다.

 

다만 선덕제는 조정 대신들이 운남성의 목성 장군도 진군하지 않고 머물러 패전을 불렀다고 탄핵했지만 짐짓 모른 척했으며, 왕통 등 베트남 주둔군 지휘관들도 옥에 가두었을 뿐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왕통은 그 뒤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있다가 다음 황제인 정통제가 오이라트에게 대패해 포로로 잡히는 1449년 토목의 변 때 풀려나 베이징 방어에 기여함으로써 은혜를 갚았다.

 

패전 책임자들의 처벌과 함께 명나라는 베트남 정복을 포기했다. 명사 안남전은 왕통이 강화를 맺기 전에 이미 선덕제가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트남에서 철수를 결정했으며, 황제의 조서가 왕통에게 미처 도착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국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비튼 것으로 추정된다.

 

드디어 지난했던 전쟁이 끝났다. 응우옌짜이는 평오대고(平吳大誥)를 지어 독립을 기념하고 베트남이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천하에 선포했다. 그 내용 일부가 다음과 같다.

 

惟我大越之國實為文獻之邦

山川之封域既殊南北之風俗亦異

自趙陳之肇造我國

與漢元而各帝一方

雖強弱時有不同而豪傑世未嘗乏

 

(우리 베트남을 생각해보니 진실로 문명국가이다.

산천의 봉역이 다르듯 남북의 풍속 또한 같지 않다.

찌에우와 딩 리 쩐 왕조가 우리나라였고,

한 당 송 원이 다른 한쪽의 제국이었다.

비록 강하고 약할 때가 같지는 않겠지만,

영웅호걸은 늘 존재하지 않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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