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5. 10:16ㆍ카테고리 없음
후레(後黎)왕조는 1433년 태조(太祖) 레러이가 사망하고 궁중 유혈사태와 반정으로 큰 혼란을 겪는다. 여기에는 왕자들의 권력욕뿐 아니라, 타잉화 출신의 무장인 개국공신들과 왕이 중앙집권을 위해 힘을 실어주려 한 탕롱 출신의 유학자 문관들의 세력다툼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2대 황제 태종(太宗)은 즉위 당시 겨우 11살 어린이였다. 태종은 아버지 레러이의 충신인 레쌋을 섭정으로 임명하고 모든 것을 의지했다.
레쌋은 피 흘려 세운 왕조에 무임승차한 눈엣가시 같은 문신들을 차근차근 제거하고 자기 측근들로 대체했다. 레쌋과 그의 후임자인 레응언 모두 무학자들로 유교보다는 어릴 때부터 익숙한 불교에 기울어져 있었다.
태종이 장성하자 개국공신들의 권력독점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문신들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유학을 장려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다수의 관리들을 임용했다.
1442년 가을 태종은 지방을 순행하는 길에 응우옌짜이 집에 방문해 식사를 하고 돌아오다 급사했다. 개국공신들이 앞장서 응우옌짜이를 국왕 시해범으로 몰아 제거했는데. 최근 역사학자들은 사실은 권력에서 소외됐던 그들이 왕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14개월 갓난아기인 태자 인종(仁宗)이 뒤를 이었다. 섭정인 모후 응우옌 씨가 개국공신의 딸이었기 때문에 권력의 추가 상당부분 다시 돌아갔다.
재위 17년 만인 1459년 이번에는 황제의 이복형인 응이전이 쿠데타를 일으켜 인종과 모후를 살해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응이전은 태종(太宗)의 장남으로 본래 태자에 책봉됐었는데 생모가 질투심이 많다는 애매한 이유로 폐위되어 서인으로 내쳐졌었다.
응이전의 생모가 홍강 삼각지 출신이어서 개국공신들이 미리 손을 써 왕이 되는 것을 막은 것으로 현대 학자들은 보고 있다. 오랜 세월 기회를 노리다 황제의 자리를 되빼앗은 응이전은 당연히 유학자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중국 제도를 도입해 육부(六府)를 설치하고, 동시에 고유 제도인 육과(六科)를 두어 관리들을 감독하도록 했다. 이 신설 기관들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문인들을 집중 배치했다.
1년 뒤 은인자중하던 개국공신 세력이 역쿠데타를 일으켜 응이전을 몰아내고 태종의 넷째아들을 새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베트남 역사상 최고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성종(聖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