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6. 00:55ㆍ카테고리 없음
우리나라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베트남 최고 성군은 단연 후레왕조의 성종(聖宗)이라 할 수 있다.
성종은 개국공신 장군들의 추대로 황제가 됐지만 성격과 이념이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학문에 몰두했고 특히 유학에 깊은 조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사변적인 학자에 머물지 않고, 황제가 신하들의 파벌싸움을 방치하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똑똑히 지켜보면서 이를 극복할 정치적 식견을 쌓아왔다.
성종은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황제의 권한을 강화시켜 나갔다. 먼저 응이전이 설치했던 육부(六府)를 황제의 직속기관으로 만들어 대장군과 대신들의 권한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육과(六科)는 이·호·예·병·형·공 체제로 개편해 권한이 강해진 육부를 견제하도록 했다.
지방행정단위인 12개 도(道)에 각각 행정, 감찰, 치안을 담당하는 승사(承司), 헌사(憲司), 도사(都司)를 두어 지방관의 권력을 분산시켰다. 촌락의 사관(社官)을 사장(社長)으로 바꾸어 마을 사람들이 직접 선출하도록 한 것도 같은 목적이었다.
여러 율령을 반포했는데, 특히 ⌜국조형률(國朝刑律)⌟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베트남의 성문법이자 후레왕조의 기본법이었다. 이 법은 당률(唐律)을 근간으로 충과 효를 강조하고 있지만, 베트남의 고유 관습도 많이 반영했다.
예를 들어 부인도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재산 상속 때 아들 딸의 차별이 없으며, 남편이 일정기간 가정을 저버리면 부인이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점 등은 중국의 법제와 확연히 달랐다.
확대된 정부조직을 운영하고 법체제를 정비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했다. 성종은 오경박사 제도를 도입하고 국립대학인 태학을 증축했다. 그리고 과거시험을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합격자 발표 행사를 대궐 안에서 화려하게 거행해 시험의 권위를 높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유학은 후레왕조 시기를 거치며 베트남의 지도이념으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성종은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곳곳에 둑을 쌓고 하천을 넓히며 농사를 장려했다. 지방 관료들에게 황무지 개간을 독려하고 나중에 경작 면적을 보고하도록 해 그 결과를 확인했다.
국경지역에는 둔전제를 실시했는데 지방병뿐 아니라 전쟁포로와 죄수들을 동원해 일을 시켰다. 토지겸병으로 사회가 병드는 것을 막기 위해 권세가가 가난한 농민과 분쟁을 일으키면 법으로 엄하게 처벌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광산 개발과 양잠을 장려해 백성들이 새 소득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