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속에 세워진 막왕조

2021. 8. 13. 10:33카테고리 없음

728x90

신변의 위협을 느낀 소종은 이번에는 군벌에게 의지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그는 타잉화에 근거를 둔 찡()씨 일가에게 밀사를 보내 막당중을 타도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탕롱 서쪽 썬떠이로 피신했다.

 

왕이 달아나고 전국에서 근왕군이 밀려오자 막당중은 소종의 동생 공황제(恭皇帝)를 즉위시킨 뒤 동쪽 자신의 세력지로 옮겨갔다.

 

소종의 도박이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힘의 한계를 오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왕의 측근과 군 지휘관들 사이에 갈등이 커지자 소종은 환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찡씨 일가 수장인 찡뚜이가 보낸 장군을 처형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찡뚜이는 병사들을 데리고 와 소종 황제를 붙잡아 타잉화로 돌아갔다. 이런 분열과 하극상은 막다른 처지에 몰려있던 막당중에게 회생의 기회를 선사했다.

 

각지의 근왕파 군대가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는지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틈을 타 막당중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 막당중은 결국 타잉화를 점령한 뒤 소종을 체포해 살해했다.

 

그리고 1527년 막당중은 후레왕조 관리들을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공황제의 선양 형식을 빌어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공황제는 몇 달 뒤 독주를 마시고 목숨을 끊어야 했고, 이로써 후레왕조는 10100년 만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폐허가 된 람낀의 후레왕조 별궁
폐허가 된 람낀의 후레왕조 별궁

막당중은 후레왕조의 제도와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성종(聖宗)의 업적을 계승해 황금시대를 다시 연다는 것이 막당중이 내세운 국정목표였다.

 

그는 성종 시대의 법령을 모은 홍덕선정서(洪德善政書)를 편찬하고 여러 차례 과거를 실시해 인재를 구했다. 이것은 후레왕조 체제가 중앙집권에 유리하고 관료들의 지지를 얻는데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위찬탈에 대한 지식인층의 저항과 대명 굴욕외교에 대한 반감 때문에 기대만큼의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막당중은 자신에 대한 비난이 잦아들지 않자 3년 만에 제위를 맏아들 막당조아잉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나는 제스처를 취했다. 물론 국가의 중대사는 막당중 본인이 결정했다.

 

막당조아잉은 아버지와 달리 온화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법을 지키는 모범을 보이려 했고, 가난한 농민들을 동정해 조세와 부역을 감해주었다. 화폐를 주조해 상품유통을 뒷받침하고 대외무역도 적극 장려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그가 젊은 나이로 죽기 전 10년 동안 막씨 정권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갔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