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4. 10:59ㆍ카테고리 없음
막왕조에 맞서 후레왕조를 복원시키려는 반란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응우옌낌(阮金)이 저항세력들을 규합해 베트남을 남북조 형세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막당중의 왕위 찬탈 때 라오스로 몸을 피했던 응우옌낌은 라오스 왕의 지원 아래 망명자들을 모아 후레왕조의 발원지인 타잉화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운의 황제 소종(昭宗)의 장남을 찾아내 새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후레왕조 유신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래도 군사력의 열세를 느낀 응우옌낌은 명나라의 도움을 얻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막왕조 군사들의 눈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3년 뒤 베이징에 도착한 사신단은 막당중의 왕위 찬탈을 알리고 토벌을 요청했다.
이미 명나라 조정은 베트남의 정변을 파악하고 내전에 개입할지 여부에 대해 대논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제11대 황제 가정제(嘉靖帝) 치세였다. 안으로 관료들의 부패와 밖으로 몽골 ·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고 황제는 권신들과의 갈등에 지쳐 도교에 심취하면서 제국은 점차 멸망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의 조정은 보물창고 같은 안남 땅을 다시 차지하고픈 욕심과 자칫 100년 전 정복전쟁 실패를 되풀이해 망국을 재촉할 수 있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예부상서 하언은 가정제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안남은 조공하지 않은지 20년이 되었고, 국경 관리들이 말하기를 그곳 왕들이 마땅히 세워져야 할 적계가 아니며 권력자들은 모두 찬역의 신하로 마땅히 조사하여 주모자가 누구인지 찾아내야 합니다.”
가정제는 “안남이 반역한 사실이 명확하므로 급히 관리를 보내 조사하고 병부와 정토(征討)를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중국 남부 다섯 개 성에 군량을 모으고 원정군 징병에 대비하라는 칙서가 내려갔다.
그러나 베트남 원정이 불가하다는 상소가 그치지 않았다. 막당중이 입공을 청하고 있다는 등의 명분론도 있었지만, 결국 명나라 상황이 대규모 원정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병부시랑 장경의 상소는 솔직하고 구체적이었다. “마땅히 30만 명을 동원해야 하고, 1년 군량으로는 160만 석을 사용해야 하며, 배를 짓고 말을 사고 무기를 만들고 군사를 위로하는 비용으로 또 70만 냥이 필요합니다. 신중히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명의 재정을 고갈시킨 임진왜란 때 조선 지원병이 21만 명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장경의 주장은 큰 과장이 아니었다.
가정제는 자신의 베트남 원정 지시에 반대 상소를 올린 신하들을 연이어 징계했다. 그래도 찬반 상소가 빗발치자 병부는 결정을 못 내리고 조정에 재논의를 청했다.
가정제는 화가 치밀었다. 신하들이 먼저 주청해 윤허했더니, 일 년이 넘도록 원정 준비는 않고 논란만 거듭하다 자기에게 다시 문제를 미룬 것이다.
가정제는 “그대들의 직책은 국정을 담당하는 자들인데 산만하여 주장도 없고 모두 회의에 떠넘기고 있다. 처음부터 협심하여 국가를 위해 도모하지 않고 있으니, 그만 두어라. 구란과 모백온은 다른 관직에 임용하라”고 명령했다.
구란은 총독군무(總督軍務), 모백온은 참찬(參贊)으로 베트남 원정군을 지휘하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소란스러운 논쟁만 벌이다 베트남 침공이 제풀에 중단되는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