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수집에 미숙했던 황제의 치욕

2021. 8. 15. 15:45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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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베트남 정벌 논쟁이 막 사그라들 무렵 갑자기 막당중이 사신을 보내 투항하고 토지와 호구를 기록해 명의 처분을 따르겠다고 밝혀왔다. 명으로서는 기대도 안 했던 막당중의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앞이 캄캄한 원정의 부담에서 벗어나면서도 실리도 챙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명나라 관리 모백온은 광서성으로 내려가 막당중에게 귀순하면 죄를 용서하겠다는 격문을 보냈다. 막당중은 관리들을 데리고 국경인 진남관(鎭南關)에 도착했다.

 

막당중의 항복
 막당중의 항복

그리고 죄인처럼 머리를 풀고 목에 줄을 맨 뒤 맨발로 기어가 단상에 머리를 찧으며 항복의 표()를 올렸다. 막당중은 토지와 인구 대장을 바치고 국경 5개 지역을 할양하며 영원히 신복하겠다고 청하였다.

 

모백온은 막당중의 죄를 사면하고, 돌아가 황제의 명을 기다리도록 했다. 모백온의 상소를 받은 가정제는 매우 기뻐하며 베트남을 안남도통사사(著革作安南都統使)로 격을 낮추고 막당중을 도통사에 제수하였다.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게 명의 제도를 본뜬 제도들을 모두 없애고 13()13선무사(宣撫使)로 바꾸되 도통사에게 이들 관직의 임명권을 허용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명목상 독립을 잃고 명나라의 행정구역으로 전락했다.

 

막당중의 굴욕적인 항복은 베트남 집권자로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명색이 일국의 황제인데 명나라 관리 앞에 무릎으로 기어가 머리를 찧는 동안 막당중 또한 참기 힘든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욕을 감수해 안전을 추구한 것은 100년 전 호뀌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호뀌리는 통일된 국가에서 수년 간 전쟁을 준비하고도 명나라 대군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는데, 막당중은 아직 내전이 진행 중이었고 새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 역시 믿을 게 못 되었다.

 

그러나 막당중은 명나라의 내부 사정을 살피는 데 게을리해 필요 이상의 비용을 치르고 굴욕을 자초했다. 이제 막 공격 계획을 취소한 명나라 관리들은 침략을 막겠다며 자신들 앞에 기어오는 막당중을 보고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치욕과 함께 국가의 자존심을 저버리고 영토까지 넘겨준 막당중의 행동은 매국노라는 딱지를 그의 왕조에 따라다니게 만들었다.

 

그래도 막당중 왕조는 몇십 년을 버텨냈다. 어부에서 일약 왕족으로 승격된 막씨들을 비롯해 집권층이 운명 공동체로 똘똘 뭉쳐있었고, 군대 우대 정책으로 10만 대군의 충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북한 정권이 유지되는 원리와도 비슷했다.

 

막당중은 군인들에게 한 사람당 4에서 5()씩 공전(公田)을 지급했다. 이는 400에서 500로 한 번에 쌀 약 3가마, 이모작을 한다면 일 년에 6가마를 생산할 수 있어 빠듯하게나마 일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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