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17. 02:05ㆍ카테고리 없음
타잉화에서는 응우옌낌이 차근차근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응우옌낌은 남쪽에 있는 응에안을 점령해 배후를 튼튼히 다진 뒤 북부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타잉화의 경계를 넘어 썬남까지 육박해 들어갔지만, 위장 투항한 막당중의 부하 장군에게 응우옌낌이 독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응우옌낌의 사위 찡끼엠(鄭檢)은 급히 군사들을 수습해 타잉화로 퇴각했고 병권을 장악해 장인의 빈자리를 차지했다.
이로부터 약 60년 동안 북쪽에는 막씨왕조 남쪽에는 찡씨 세력이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두 세력은 서로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았지만, 막왕조가 찡씨의 영역으로 쳐들어가는 경우가 좀 더 많았다. 이는 막왕조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홍강 유역에 자리 잡아 자원 확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세는 1562년 5대 황제인 막머우헙(莫茂洽)이 제위에 오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왕조 개창 30여 년이 지나 집권층의 긴장이 이완된 데다, 막머우헙은 정사보다 주색에 더 관심이 있는 무능한 지도자였다.
그 사이 남쪽에서는 찡끼엠이 죽자 아들 찡뚱(鄭松)이 형을 제치고 권좌에 올랐다. 권력 교체의 혼란을 틈타 막머우헙이 남조 땅 깊숙이 침공했다 돌아갔는데, 이 무공 때문에 막머우헙은 더욱 교만해졌다.
혼란을 수습한 찡뚱은 썬남까지 치고 올라가 많은 식량을 빼앗아 돌아갔고, 이후 연례행사처럼 군사작전을 벌여 북조를 수세에 몰아넣었다.
1591년에는 남조군 5만 명의 공격을 북조군 10만 명이 제대로 막지 못해 막머우헙이 도망가고 탕롱이 점령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찡뚱은 사방에 막왕조의 잔존세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적의 영토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탕롱성을 버리고 다시 타잉화로 돌아갔다.
멋쩍은 표정으로 탕롱에 돌아온 막머우헙은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이은 패전이 멸망의 전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그는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북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부이반쿠에는 아내가 절세 미녀였다. 우연히 그녀를 본 막머우헙은 욕망에 사로잡혀 부이반쿠에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으려 했다.
이를 눈치챈 부이반쿠에는 탕롱을 탈출해 찡뚱에게 투항했다. 찡뚱은 이제 오랜 내전을 끝낼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총력전이었다. 찡뚱은 부이반쿠에를 선봉장으로 세워 전군을 동원해 북진을 시작했다. 황제가 저지른 추한 스캔들이 퍼지며 북조 군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제까지 상관으로 모시던 사람이 적의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목숨을 걸고 대항할 의지를 잃었다.
탕롱성을 버리고 달아났던 막머우헙은 마지막 저항에서 패하자 절에 숨어 들어가 있다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592년 베트남은 치열했던 내전을 끝내고 다시 통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