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 2) 후금 건국과 숨 막히는 압박

2021. 8. 20. 10:23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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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러산 전투의 승리는 만주의 세력 판도를 바꿔놓았다. 여러 부족들이 누르하치를 새로운 강자로 인정했다.

 

몽골에서도 코르친 부족과 칼카 부족이 복종의 뜻을 전해왔다. 누르하치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인구가 적은 여진족이 명나라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몽골족과 제휴가 반드시 필요했다. 누르하치는 본인뿐 아니라 왕자들에게도 몽골족과 혼인을 적극 권장하여 두 민족의 융합에 노력했다.

 

해서여진 울라부를 공격하는 누르하치 (만주실록)
해서여진 울라부를 공격하는 누르하치  (만주실록)

누르하치는 해서여진 부족들을 각개격파해나갔다. 그들은 서로 사이가 나빠 단합하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그 틈을 파고들어 공격하거나 내정에 간섭하며 세력을 넓혔다.

 

해서여진 부족들을 놓고 예허부와 누르하치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명나라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허부의 편을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예허부 외에는 해서여진의 모든 부족들이 누르하치에게 복속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더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불같이 일어서는 누르하치 세력의 성장을 이제는 꺾어야 했다. 1915년 명나라는 만주와의 교역을 중단했다.

 

누르하치에게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이었다. 그는 교역을 통해 형성한 경제력으로 군대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당장 식량 수입이 안 되면 백성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명나라 눈치를 보며 충돌을 극구 피해왔다. 해서여진 부족들을 공격하다가도 명나라가 개입하면 승리를 눈앞에 두고 물러서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누르하치는 식량자급률을 높이려고 경작을 적극 추진했다. 명나라는 이마저도 방해했다. 국경 일대에서 농사를 짓던 여진족 농민들을 내쫓은 것이다. 대대로 여진족이 살아왔고, 불과 몇 년 전 누르하치가 무순(撫順)의 명나라 관리들로부터 거주권을 인정받았던 땅이었다.

 

누르하치는 분노했다. “명은 이미 예허를 도왔고 우리 백성이 벼를 수확하지도 못하게 한다. 묻노니, 황제의 마음은 이미 옮겨갔는가? 명나라는 물론 대국이다. 그러나 어떤 성에도 1만의 병사를 주둔시키지는 못할 터, 그것은 우리가 포로로 삼기에 적당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피할 수 없으면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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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팔기군 병사
만주족 팔기군 병사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후금(後金)으로 고치고 칸에 즉위했다. 그리고 백성들을 몇 단계로 묶어 성인 남자 7500명을 쿠사 즉 한자로 기()라 불렀다.

 

이는 사회조직이자 동시에 전투집단이었다. 여진족이 8개 기였고, 귀순해 오는 한족과 몽골족도 별도의 기를 만들었다. 후금의 모든 백성들을 고도로 효율적이고 기동력이 있는 전투조직으로 편성한 것이다.

 

만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나라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도발은 계속되었다.

 

광녕순무(廣寧巡撫)가 새로 부임해 왔다. 명나라의 요동군사령관 자리였다. 누르하치는 축하 사절단을 보냈다.

 

그런데 새 광녕순무가 이들을 감옥에 잡아넣고 국경을 넘어온 명나라인을 살해한 범인들을 넘기라고 협박했다. 교섭에 실패한 누르하치는 전쟁 포로들을 범인으로 속여 보내고 사절단을 빼왔다.

 

이제 명나라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16184, 누르하치는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누르하치는 그 자리에서 명나라와 싸워야 하는 일곱 가지 원한 즉 칠대한(七大恨)’을 발표했다.

 

그리고 기병과 보병 2만 명을 이끌고 무순을 향해 진군했다. 동북아 패권을 놓고 벌어진 거대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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