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 3) 명나라의 첫 패배, 무순 전투

2021. 8. 21. 21:00카테고리 없음

728x90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1618415일 무순성을 포위했다. 성 아래 새까맣게 모여둔 후금군을 보고 겁이 난 무순성 성주 이영방은 얼른 항복했다.

 

무순성 성주 이영방의 항복 (만주실록)
무순성 성주 이영방의 항복  (만주실록)

무혈 입성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명나라 상인 10여 명을 풀어줬다. 그는 상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며 고향에 돌아가 후금의 칠대한문서를 퍼뜨리라고 말했다.

 

사실 시키지 않더라도 상인들이 돌아가면 이 엄청난 난리에 대해 떠들텐데, 칠대한 문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금이 악당이라 전쟁이 난 게 아니라 명나라 조정의 박해 때문이라는 선전전의 일환이었다.

 

누르하치는 무순 성벽을 무너뜨린 뒤 주민들을 모두 포로로 끌고 갔다. 인구가 부족한 후금에게 땅보다는 사람이 더 귀한 자원이었다.

 

며칠 뒤 총병 장승음이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그러나 그의 병력은 1만 명이었고 후금군은 증원돼 6만 명에 달했다. 장승음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참패했고 그도 목숨을 잃었다.

 

후금 인구는 백만 명으로 명나라의 100분의 1이었다. 군대의 총병력도 절대 열세였다. 그러나 뛰어난 기동력으로 개별 전투에서는 오히려 병력이 우위인 상태에서 명나라와 맞붙었다. 이 같은 양상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반복되었다.

 

무순성 함락 소식이 알려지자 명나라 조정과 백성들은 동요했다. 그동안 북방의 몽골도 버거운 상대였는데, 여진족까지 다시 일어선 것이다.

 

요동이 무너지면 산해관이 위협받고, 그곳이 뚫리면 바로 북경이었다. 산해관 방비를 강화하고 오랑캐를 즉시 토벌해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728x90

명나라 군대 (사진 출처 Wikimedia)
명나라 군대  (사진 출처  Wikimedia)

그러나 현실은 암담했다. 당시 병부좌시랑 설명에 따르면 요동의 방어선은 2천 리인데 병력은 9만 명뿐이었다. 광활한 지역에 분산된 명나라군을 후금군이 집중 공격하면 결과는 불보듯 했다.

 

그나마 요동에 필요한 군비 은화 50만 냥을 보내지 못해 병사들이 군량도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대를 추가 파견할 비용이 어디에 있겠는가.

 

명나라에 돈은 있었다. 황제 만력제(萬曆帝)가 사금고인 내탕에 은화 수백만 냥을 쌓아 놓고 있었다.

 

신하들은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는 거절했다. “짐의 내탕이 공허해 요동의 군사비를 대기가 곤란하다.” 나라가 망하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한데, 그 가운데 첫째가 지도자의 무능이다.

 

만력제는 열 살에 즉위해 48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집권 초기 10년간 명재상 장거정이 섭정을 맡아 부패척결 조세개혁 군비확충 등 많은 치적을 이루었다. 재정수입은 두 배로 늘었고, 남쪽에서 척계광 북쪽에서 이성량이 활약해 국경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장거정이 죽고 만력제가 친정에 나선 뒤 모든 것이 무너졌다. 만력제는 대궐 깊은 곳에서 술과 여자에 둘러싸여 노는 데 전념했다. 수십 년간 조정에 나오지 않아 중신들 가운데 황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만력제는 재물도 좋아했다. 환관들을 각지에 보내 백성들을 쥐어짰다. 가뜩이나 소방하기인 17세기 대흉년으로 어려움을 겪던 백성들을 민란으로 내몰았다. 만력제는 그렇게 모은 재물을 쌓아놓고 즐길 뿐 나라에 급한 일이 생겨도 풀어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명나라가 숭정제 때 망했지만, 망국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만력제라는데 입을 모은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