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 4) 운명을 건 사르후 전투

2021. 8. 22. 12:01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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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이 정면공격을 가해왔으니 명나라가 이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했을 때에도 가정(家丁)이라 불리는 군벌들의 사병이 왜군을 격파하면 뒤에 있던 관군이 달려들어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그런데 이 사병들마저 계속된 내란 과정에서 거의 다 소모되었다. 병사들을 급히 징집해 20만 명 가까이 모았지만 훈련이 안 된 오합지졸들이었다.

 

명나라는 동맹국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머뭇거리는 조선을 닦달해 11,500명을 파견받았다. 여진족 내 누르하치의 경쟁 세력인 예허부도 15,000명을 보내왔다. 특히 조선의 조총수들은 명나라에 절실하게 필요했던 정예병이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서로 이들을 데려가겠다고 싸웠다.

 

사르흐 전투 1 (만주실록)
사르흐 전투  1 (만주실록)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병부시랑 양호가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그밖에 두송과 마림, 역시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유정 등이 정벌군을 이끌었다. 이여송의 동생인 이여백도 퇴역해 있다가 만주 사정을 잘 안다는 이유로 발탁됐다.

 

그런데 지휘관들 개개인은 그렇게 무능하지 않았으나, 서로 사이가 나빴고 전혀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사령관 양호가 이를 조율할 능력도 없었다.

 

양호는 군대는 넷으로 나누어 만주로 들어가 후금 수도인 허투알아 앞에서 합류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행군의 편의와 군량의 현지 조달 등을 위해 택한 전략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후금군에 각개 격파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정벌군 중 남로군 지휘관인 이여백은 누르하치와 인척 관계여서 내통할 수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발탁하지 말았어야 했다.

 

또한 동로군 지휘관인 유정은 양호 총사령관과 매우 사이가 나빴다. 양호는 유정에게 수천 명의 병력만 배정해 가장 험지로 보냈다. 유정은 자기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서로군과 북로군은 각각 두송과 마림이 이끌었다. 두송은 용맹한 장수였다. 그러나 신중하지 못했고 적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두송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부하들을 재촉해 예정보다 이른 1619229일 혼하(渾河)를 건넜다. 31일 사르후(薩爾滸)에 도착한 두송에게 솔깃한 첩보가 들어왔다. 누르하치가 인근 계번에 성을 쌓고 있는데 경비병이 400명뿐이라는 내용이었다. 두송은 1만 군사를 이끌고 계번성을 치러가고, 나머지 2만 명은 사르후에 남겨두었다.

 

두송이 받은 첩보는 정확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지속적인 정찰을 통해 두송을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아들 홍타이지에게 팔기군 2기를 데리고 가 계번성을 구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팔기군 645,000명을 이끌고 사르후로 향했다.

 

후금군은 그날 밤 사르후의 명나라군 주둔지를 공격했다. 명나라 병사들도 대포와 활을 쏘면 분전했지만 어둠 속의 적을 맞출 수가 없었다. 반면에 후금 병사들은 횃불이 밝혀져 있는 명나라군 진영에 조준 사격이 가능했다. 결국 사르후의 명나라군은 전멸했다.

 

계번성을 향하던 두송도 매복해 있던 홍타이지의 후금군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여기에 사르후를 점령한 누르하치가 전군을 이끌고 달려와 뒤에서 공격했다. 명나라군은 무너졌고 두송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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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흐 전투 2 (만주실록)
사르흐 전투  2 (만주실록)

북로군의 마림은 32일 서로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군대를 상간하다(尙間厓)로 후퇴시켰다. 그리고 산 위로 올라가 참호를 파고 대포를 설치해 방어에 들어갔다. 누르하치가 도착해 보니 기병이 돌격했다가는 포격에 전멸당할 위험이 있었다.

 

누르하치는 병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해 산개한 채 명나라군 진영을 공격했다.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명나라 병사들도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후금 지원군이 사방에서 몰려오면서 점점 전세가 기울었다.

 

북로군 안에 반종안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용맹했던 그는 신중한 마림을 비겁자라고 매도해왔다. 반종안은 후위부대를 이끌고 근처에 있었는데 마림이 혈투를 벌이는데도 구할 생각을 안 하고 구경만 했다.

 

마림의 부대는 결국 패주했다. 누르하치는 곧바로 전열을 다시 갖춰 반종안의 부대로 쳐들어갔다. 명나라 장수들의 상식 이하의 작태는 망할 수 없는 나라를 어떻게든 망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마림과 반종안 부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서여진의 예허부는 참전을 포기하고 자기 부족으로 돌아갔다.

 

주력군인 서로군과 북로군의 패배에 놀란 양호 총사령관은 이여백과 유정에게 진군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이여백의 남로군은 퇴각했지만, 이미 적진 깊숙이 들어간 유정은 퇴각 명령을 전달받지 못했다.

 

34,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과 8남 홍타이지 등이 이끄는 후금군 2만 명이 아부달리(阿布達裡)에서 유정의 동로군을 공격했다. 포위당한 명나라 병사들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유정은 남은 화약과 장작을 쌓아놓고 부하 장수들과 함께 자폭했다.

 

이때 동로군 후위부대에는 조선 지원군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유정의 본진에서 많이 뒤처져 부차(富車)에 도착해 있었다. 다이샨과 홍타이지는 여세를 몰아 이곳까지 들이닥쳤다. 조선군은 병사 6천 명이 전사하는 큰 패배를 당한 뒤 후금군에게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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