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1. 15:36ㆍ카테고리 없음
왕과 태후의 매국 행위로 나라가 통째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승상 르기아를 중심으로 한 백월족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남비엣 조정에서는 친한파(親漢派)와 반한파(反漢派) 사이에 격렬한 정쟁이 벌어졌다.
승상 르기아는 남비엣의 세 임금을 섬긴 노신으로 집안에 고관대작이 70명이 넘었고 왕실과 몇 겹의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나라에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 왕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태후가 르기아를 죽이자고 재촉했지만, 애왕과 한나라 사신들은 그를 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무제는 답답한 상황을 보고받고 한천추에게 병사 2천 명을 주며 남비엣으로 가 르기아를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한 무제는 남비엣 합병이 단지 정쟁 때문에 미뤄지는 것이고 르기아만 체포하면 걸림돌이 모두 사라질 것으로 낙관했다.
그러나 이런 무력개입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한나라가 군대를 보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르기아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르기아는 “왕과 태후가 남비엣 백성들을 장안으로 끌고 가 노예로 팔고 있다”며 백월족의 민족 감정을 선동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대궐로 쳐들어가 왕과 태후를 살해했다. 르기아는 선왕인 명왕의 맏아들 건덕(建德)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한편 한천추는 국경을 넘어 진격하면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 남비엣 왕들이 먼저 한나라의 눈치를 보거나 아예 나라를 바치려고 하면서 백성들의 자주 의식이 많이 와해됐던 것이다. 우쭐해진 한천추는 남비엣 수도 번우에 40리 가까이 접근했다가 르기아가 이끄는 남비엣 군대의 기습을 받아 부대 전체가 궤멸됐다.
한 무제는 대노했다. “지금 남월의 여가(르기아)와 건덕이 반란을 일으켜 아무 일도 없는 듯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있다. 대신들은 어찌 이런 역적을 토벌해 섬멸하지 않는가? 죄인들과 강회(江淮) 이남의 수군 10만으로 바로 가서 역적을 정벌하라!”
한 무제의 말 속에는 당시 한나라의 여의치 않은 사정이 배어있다. 한나라가 기원전 133년 시작한 흉노와의 전쟁은 만리장성 너머 내몽골 지역까지 차지하는 대성과를 거두었지만, 흉노를 절멸시키려는 무제의 무리한 욕심에 나라 전체가 피폐해지고 있었다. 가면 돌아오지 않는 거듭된 원정은 한나라의 인적 물적 자원을 마치 블랙홀처럼 고갈시켰다.
여기에 남비엣을 비롯해 고조선과 서쪽 대완국 등 주변국 침략까지 저지르면서 무제 치하의 40년 전쟁이 끝날 때쯤 한나라 인구가 4천만 명에서 2천만 명으로 줄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소모전 와중에 남비엣을 정벌하겠다고 북부전선에서 남부로 병력을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한 무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대흉노전에 참가할 수 없었던 수군과 감옥에 갇혀있는 험한 죄수들뿐이었다.
남비엣 원정은 한 무제의 기대와는 달리 온갖 차질 속에 어지럽게 진행됐다. 구중궁궐에서 살아온 무제는 죄수들을 풀어주면 금방 충성스러운 병사로 거듭날 걸로 상상했지만, 사악한 그들에게 무기를 들려 전장에 밀어 넣는 일은 대단히 힘들고 위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