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 5) 현명했던 광해군

2021. 8. 23. 13:2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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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을 앞세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광해군은 외교에 관한 한 보기 드문 혜안을 가진 왕이었다. 그는 국제정세 변화를 예의주시하며 정보수집에 노력했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시달리던 해서여진 울라 부족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1610년 조선에 관직과 교역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광해군은 울라 부족장에게 관직을 하사하면서 만주의 정세를 자세히 탐문했다.

 

다음 해 역관 하세국이 건주여진에 포로로 잡혀있다 돌아오자, 광해군은 그를 환영하며 정6품 사과(司果) 벼슬을 제수했다. 그의 견문과 여진어 실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건주여진에 사람들을 계속 보내 동향을 파악하라고 강조했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야 상호 오해로 인한 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 대여진 외교의 최종 목표는 전쟁 예방이었다.

 

광해군은 전쟁을 막으려면 국방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군이 여진족 기병을 이기려면 화포로 맞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광해군은 각종 화포를 주조하고 화약 원료인 염초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즉위 첫해에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다. 그리고 통신사를 보내면서 조총과 장검을 구입해 오라고 지시했다.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고 일본과 싸웠던 광해군은 저들 무기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밖에도 수시로 무과시험을 열어 합격자들을 변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곽재우를 불러 북병사(北兵使)에 제수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과 화의를 주장했다 선조에 의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과 명나라는 결국 정면 충돌했다. 광해군은 두 강국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약소국의 현실과 조선 내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어쩔 수 없이 죄 없는 병사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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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실록 광해군일기
조선 실록 광해군일기

명나라 병부좌시랑 왕가수가 16184월 조선 조정에 격문을 보내왔다. 왕가수는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에 군대를 보낸 은혜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이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누르하치를 공격하는 데 동참하라고 요청했다. 사실상 참전 명령이었다.

 

광해군은 파병에 반대했다. 그는 조선의 병력을 동원해 봐야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수천 명 정도를 의주에 대기시켜 협공의 형세를 취하는 선에 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명에 보내는 회답에 경솔하게 정벌에 나서지 말고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을 첨가하라고 지시했다.

 

비변사에서 난리가 났다. 감히 대국인 명의 군무(軍務)에 간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야를 막론하고 모든 성리학자들이 임진왜란 때 입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아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래도 광해군은 버텼다. 출병 요구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 신하에 불과한 왕가수라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황제에게 직접 아뢰겠다며 연속 사신들을 보냈다. 그런데 이 사신들을 정벌군 사령관으로 요양성에 와있던 양호가 못 가게 막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던 중 16188월에 병력을 동원하라는 황제의 칙서가 조선에 왔다. 조선의 관리들은 지원군을 보내라고 더욱 날뛰었고, 결국 광해군이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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