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25. 00:23ㆍ카테고리 없음
몽골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수만 명의 몽골인들이 식량을 구하러 명나라 국경을 넘어왔다.
요동경략이었던 원응태는 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여 요양과 심양 두 성에 수용했다. 이들을 외면하면 누르하치에게 가 후금의 인구와 군대를 늘려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난민 가운데 후금의 밀정들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첩보전에 매우 능한 사람이었다.

1631년 3월 후금군이 심양성을 공격하다 물러갔다. 성주 가세현은 이들을 추격하다가 복병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사이 성안에서 밀정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문을 닫았다. 가세현은 성 밖에서 후금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심양성은 함락되었다.
닷새 후 누르하치는 후금군 전체를 동원해 요양성을 공격했다. 요동의 중심도시였다.
명나라군 3만 명이 결사항전했지만 성내 곳곳에 불길이 치솟으며 후금군에 무너지고 말았다. 성 안에 있던 밀정들이 방화를 한 것이다. 요동경략 원응태는 불 속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요양성이 함락되자 요하 동쪽의 50여 개 요새와 70여 개 성들이 태풍에 휩쓸리듯 후금군에 무너졌다. 요동 지역 전체가 후금의 영토가 된 것이다.
명나라 조정은 부랴부랴 얼마 전 쫓아냈던 웅정필을 요동경략에 다시 임명해 사태를 수습하도록 했다. 그런데 하급자인 광녕순무 왕화정이 당시 실권자였던 환관 위충현의 비호를 믿고 하극상을 저질렀다.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던 전 무순성 성주 이영방이 밀사를 보내 후금 진영에서 내응하겠다고 알려왔다. 신이 난 왕화정이 여기저기 지원병을 알아봤다. 조선의 평안도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이 후금의 배후를 치겠다고 약속했고, 몽골에서도 40만 병력을 보내겠다고 통보했다.
웅정필은 깜짝 놀라 왕화정을 말렸다. 모문룡은 명나라 패잔병을 모아 조선에 들어간 뒤 조선 조정을 수탈하고 후금과 밀무역을 하는 못 믿을 인간이고, 몽골의 40만 지원군은 헛꿈에 불과하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왕화정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웅정필이 시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1622년 1월 왕화정은 6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 유역의 광녕성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몽골의 40만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누르하치가 얼어붙은 요하를 건너 서쪽으로 쳐들어왔다.
명나라 전초기지인 서평보가 공격을 받자 왕화정은 손득공에게 병력 3만을 주어 이를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손득공은 후금군을 보자 먼저 달아났다.
손득공은 광녕성으로 돌아가 명나라군이 대패했다고 떠들었고, 두려움에 휩싸인 장수들은 왕화정을 강제로 말에 태워 탈출시켰다. 후금군은 아무 저항 없이 광녕성이 들어오고 손득공이 앞장서 항복했다.
이제 요서 지역까지 후금에 넘어가고 명나라 방어선은 산해관으로 후퇴했다. 거기서 북경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명나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패장인 왕화정은 환관 위충현 일당이 두둔해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간의 논쟁 끝에 오히려 무모한 작전을 말렸던 웅정필이 체포돼 참수당했다. 나라는 그냥 망하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