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 9) 충신을 버려 망국을 재촉하다

2021. 8. 27. 00:4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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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이며 정사에 관심이 없어 목수일만 하던 명나라 천계제가 1627년 사망했다. 뱃놀이를 하다 물에 빠진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천계제는 숨지기 전 이복동생 숭정제에게 너는 나보다 재능이 많으니 나라를 잘 다스릴 거다라면서 제위를 물려줬다.

 

숭정제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그보다 부지런했던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평화 시기였다면 많은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힘으로 돌이키기에는 명나라의 국운이 너무 기울었다.

 

그는 즉위 초에 환관 위충현 일당을 제거해 조정의 기강을 다잡았다. 솔선수범해 국고를 아끼고, 그래도 재정이 부족하자 세금을 올리며 내 백성들에게 1년만 폐를 끼치겠다고 호소하는 겸허함도 갖췄다. 후금 침략에 맞서기 위해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고 서양식 무기 공장까지 세웠다.

 

그러나 오랜 정치 문란에 17세기 소빙하기 영향까지 겹쳐 흉작과 유민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숭정제는 성격이 급하고 의심이 많아 여러 신하들을 처형했는데 결정적인 실수도 저질렀다.

 

명나라 원숭환 장군 초상
명나라 원숭환 장군 초상

숭정제는 즉위 직후 영원성 전투의 영웅 원숭환을 파직했다. 환관 위충현의 지원을 받은 일 때문에 그의 일당으로 몰린 것이다.

 

그러나 후금을 막을 적임자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몇 달 뒤 요서 방어 책임자로 임명하고 병부상서로 승진까지 시켰다. 그리고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고 휘하 장병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과 그 상징인 상방보검(尙方寶劍)을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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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6월 원숭환은 작전회의를 하자며 모문룡을 불렀다. 모문룡은 거의 10년째 평안도 철산의 가도에 진을 치고 명나라군 패잔병 및 후금 탈출자들을 모아 조선에 온갖 패악질을 하고 있었다.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받은 은자를 빼돌리고 심지어 후금에 식량을 밀수출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상급자인 원숭환의 소환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모문룡은 병사 28,000명을 이끌고 위세를 과시하며 갔다. 원숭환은 실제 작전회의를 하고 연회를 베풀며 안심시키다 갑자기 모문룡을 체포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죄상을 열거한 뒤 황제가 하사한 상방보검으로 참수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모문룡은 후금을 뒤에서 견제한다는 명분이 있었고, 북경에 꾸준히 뇌물을 보내며 인맥 관리를 해와 그의 즉결처형에 대해 많은 환관과 중신들이 원한을 품었다.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사진 출처 Wikimedia)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사진 출처 Wikimedia)

그해 10월 후금의 2대 황제 홍타이지가 군대를 이끌고 북경 근처에 나타났다. 원숭환이 지키는 산해관을 통과하기 힘들자 몽골 부족들의 도움을 받아 북쪽으로 우회해 만리장성을 넘은 것이다.

 

후금군은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했다. 원숭환이 서둘러 달려와 북경성 인근에서 사투 끝에 후금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황제와 백성 모두 원숭환에게 감사하는 게 아니라 왜 국경이 뚫렸느냐고 원망했다.

 

여기에 후금의 장기인 이간책이 나왔다. 홍타이지는 포로가 됐던 환관들을 돌려보내며 원숭환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 원숭환을 벼르고 있던 환관과 중신들은 이때다 생각하고 그를 맹렬히 탄핵했다.

 

숭정제는 그를 체포해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원숭환은 죽기 직전까지도 부하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말라고 다독였다.

 

이러한 충신 원숭환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자 그를 따르던 산해관의 장병들이 동요했다. 많은 장수와 병사들이 후금에 투항했으며, 이때 명나라군 비장의 무기였던 홍이포도 후금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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