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 11) 끝까지 분열했던 남명정권

2021. 8. 29. 01:11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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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멸망하자 많은 황족과 관료들이 강남으로 피신했다. 명나라는 양쯔강 이남의 세력으로도 충분히 국가를 재건해 유지할 수 있었다. 과거 금나라에 쫓겨간 송나라도 그러했다.

 

특히 남경은 명 태조 주원장이 나라를 세운 곳으로 영락제 때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도 특별 관리하던 도시였다. 그곳의 방어시설과 전략물자가 충분했다.

 

남경의 성벽
남경의 성벽

숭정제의 자결 소식이 알려지자 남경에서는 다음 황제로 누구를 옹립하느냐는 논쟁이 시작됐다. 유력한 후보자는 2명이었다. 만력제의 손자인 주유승과 조카인 주상방이었다.

 

주유승은 탐욕스럽고 음탕하며 불효하는 등 거의 망나니였다. 반면에 주상방은 유능하고 평판이 좋았지만 혈통에서는 조금 밀렸다. 격렬한 당쟁을 벌인 끝에 군사력을 보유한 마사영의 지지를 받고 주유승이 16446월 보위에 올랐다. 1기 남명정권에 수립된 것이다.

 

황제가 된 주유승은 백성들의 우려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나랏일은 내팽개친 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지내고 후궁들을 뽑는 데만 열을 올렸다.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양쯔강을 방어해야 할 장군 좌량옥이 실권자 마사영과 갈등을 빚다 군사들을 데리고 남경으로 쳐들어 왔다. 이를 막기 위해 양쯔강의 다른 부대들을 불러와야 했다.

 

이 틈에 청나라군이 강을 넘어 양주를 공격했다. 이곳은 병부상서 사가법이 방어하고 있었다. 사가법은 청나라 침략을 예상해 이곳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남경의 권신들은 사가법이 권력 장악을 노린다고 생각해 오히려 일을 방해했다.

 

사가법은 외롭게 청나라군에 맞서 상당 기간 버텨냈다. 그를 지원해야 할 다른 부대들은 내란을 진압하러 남경에 가 있었다. 결국 사가법은 패배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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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법 장군 사당 (사진 출처 Wikimedia)
사가법 장군 사당  (사진 출처  Wikimedia)

그제서야 남경의 군신들은 나라가 다시 망한 것을 알았다. 홍광제 즉위 1년째 되던 날 남경이 청나라군에 함락됐다. 홍광제는 살아보겠다고 도망치다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됐으며 온갖 조롱을 당한 뒤 처형됐다.

 

남경에서 달아난 명나라 유신들은 16458월 복건성 복주에서 주율건을 다시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융무제이다. 융무제의 노력으로 복주 정부는 점차 국가의 형태를 갖춰갔다.

 

해외무역으로 시작해 남동부 해안의 지배자가 된 정지룡이 융무제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정지룡의 힘으로도 태풍 같은 청나라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청나라군에 포로로 잡힌 융무제는 단식으로 저항하다 숨졌으며, 정지룡 등 많은 중신들이 항복했다. 정지룡의 아들 정성공은 항복에 반대하며 독립해 대만을 점령하는 등 한때 막강한 해상세력을 형성했다.

 

중국 복건성 하문의 정성공 석상 (사진 출처 Wikimedia)
중국 복건성 하문의 정성공 석상  (사진 출처  Wikimedia)

살아남은 명나라 유신들은 또 황제를 옹립하고 저항을 이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6468월 광동성 광주에서 융무제의 동생 주율오가 황제로 즉위해 소무제가 됐는데, 같은 달 역시 광동성 조경에서 만력제의 손자 주유랑도 황제에 옹립돼 영력제가 되었다.

 

이미 황제가 된 이상 서로 타협이 쉽지 않았다. 두 세력은 광주 삼천에서 교전해 소무제 측이 대승을 거두었다. 청나라군이 보아도 한심한 일이었다. 그해 12월 말 청나라군이 쳐들어오자 광주 정부는 붕괴되었고 소무제는 자결했다.

 

이제 영력제만 남았다. 그는 청나라군을 피해 서쪽으로 도주했다. 그럴수록 정성공의 저항세력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영력제는 운남성 곤명을 거쳐 미얀마로까지 피신했다. 그곳에서 미얀마 왕과 백성들에게 3년간 온갖 무시를 당하며 지냈다.

 

미얀마 왕은 청나라군 오삼계가 국경까지 진격해오자 영력제와 황족들을 내주었다. 영력제는 오삼계에 의해 피살되었고, 이로써 명나라의 저항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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