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2. 20:52ㆍ카테고리 없음
한나라의 당초 계획은 원정군을 다섯으로 나누어 남진하는 것이었다. 명장으로 칭송받던 노박덕이 계양에서 회수로 내려가고, 수군사령관 양복이 예장을 거쳐 횡포로 내려간다. 그리고 남비엣에서 귀순한 과선 장군과 하려 장군, 치의후가 각각 다른 길로 진격해 남비엣의 수도 반우에 집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정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정규군인 수군은 곧바로 출동이 가능했지만, 주변에서 병사를 차출하고 한 무제가 사면령을 내린 죄수들을 군대로 편성하는 작업은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진노한 천자에게 기다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준비가 된 부대부터 진격을 시작했다.
양복이 이끄는 수군 수만 명이 심협과 석문을 함락해 남비엣의 전함과 식량을 빼앗았다. 전처럼 한나라가 육로로 침략해올 것이라 예상하다 수군의 기습을 받은 남비엣군은 멀리 물러났다. 양복은 진격을 멈추고 며칠 동안 노박덕 부대를 기다렸다.
약속한 기일이 한참 지나 도착한 노박덕은 겨우 1천 명의 병력을 데리고 왔을 뿐이었다. 죄수들을 훈련시켜 출발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행군 중에 달아난 것이다. 양복은 노박덕의 명성이 허울뿐이라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나마 다른 3개 부대는 언제 온다는 소식조차 없었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두 장군은 남비엣 수도를 향해 다시 진군했다. 편제가 제대로 갖춰진 양복의 부대가 앞에 서고 노박덕이 뒤를 따라가는 대형이었다. 르기아가 지휘하는 남비엣군은 번우 성문을 굳게 닫고 항전했다.
한나라군이 번우에 도착하자 교만한 양복은 상의도 없이 지형이 유리한 동남쪽을 냉큼 차지했다. 노박덕은 성 서북쪽에 진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복이 우세한 군세로 적을 강타하는 전투를 한다면, 노박덕은 뛰어난 전술로 적을 자멸시키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노박덕은 저녁 무렵에 성 앞에 도착해 진을 치면서 병력 수가 대단히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노박덕의 명성을 듣고 두려워한 남비엣 병사들이 항복해오자 관직을 주겠다며 회유해 다시 성안으로 들여보내 항복을 권유하도록 했다.
한밤중에 양복이 불화살로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남비엣군은 힘껏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목숨을 구해 서북쪽 노박덕 쪽으로 몰려갔다. 새벽이 되자 성안에 있던 남비엣 병사 대부분이 노박덕에게 항복했다.
승상 르기아와 남비엣 왕은 바닷가로 달아나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지만 얼마 뒤 체포됐다. 한나라군은 남비엣 영향권에 있었던 오늘날의 광동성 광서성 지역의 창오군과 구월 낙월을 신속히 장악했다.
한나라군이 남쪽으로 계속 진격해 오늘날의 베트남 북부인 쟈오찌와 끄우쩐 군에 다가가자 두 군을 통치하던 사자(使者)들이 호적 장부를 들고 와 항복했다. 한나라는 두 사람을 태수로 임명해 예전처럼 다스리게 하고, 토착 지배계층인 락장과 락후들의 권한도 그대로 인정했다.
따라서 한나라에 대한 이들의 저항도 거의 없었다. 남비엣이 어우락을 정복할 때 벌어졌던 일이 또 한 번 반복된 것이다. 이를 통해 지배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했지만, 베트남 백성들은 그 뒤 천 년 동안이나 중국의 지배 아래 모진 수탈을 겪어야 했다.
남비엣은 찌에우다가 나라를 세운 지 93년 만에 멸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중국의 압력에 결연히 맞서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찌에우다의 주체의식은 면면히 이어져 훗날 베트남 군주들이 중국과 대등한 관계라고 여기는 중요한 원형이 되었다.
찌에우다를 오늘날 중국 사람들은 이단자로,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침략에 대항한 위대한 황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13세기 「대월사기」를 지은 레반흐우는 진정한 베트남의 역사는 남비엣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찌에우다의 활약부터 역사를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