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3. 09:14ㆍ카테고리 없음
쯩짝의 열정과 그녀를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지만, 베트남이 독립을 쟁취하기에는 국제정세가 너무 나빴다. 쯩짝이 거병했을 때 중국은 이제 막 내전을 수습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 국력이 극성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쯩짝이 상대해야 할 후한(後漢)의 시조 광무제(光武帝)는 정치와 군사 모든 면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기원 전후에 한나라가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혼란스러워지자 재상 왕망이 천자에게 양위를 강요해 신(新)나라를 세웠고, 왕망의 비현실적인 이상정치에 반발해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한나라 왕족인 유수(劉秀)가 곤양 전투에서 포위된 성을 홀로 빠져 나와 소수의 원군을 모은 뒤 적의 중심부를 타격하는 대담한 작전으로 왕망의 40만 대군을 와해시켰다. 유수는 이 결정적 승리를 기반으로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오른 뒤 다른 반란군들을 하나씩 제압했다. 그때가 쯩짝이 봉기하기 15년 전인 서기 25년으로, 유수가 복원한 한 왕조를 후한으로 구분해 부른다.
광무제는 쯩짝 자매의 반란을 심각한 위기로 받아들였다. 베트남뿐 아니라 여타 변경지역의 불안을 촉발할 불씨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병사 3만 명을 마원(馬援) 장군에게 주고 진압을 명했다. 광무제가 미리 남부 각지의 관아에 명령해 마차와 배를 만들고, 다리를 고치고, 산길을 내고, 군량을 준비했을 정도로 대규모 원정이었다.
마원은 과거 내란 중 광무제 휘하에 들어가 싸웠고, 강력한 반란군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외효를 토벌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통일 뒤인 서기 35년에는 서쪽에서 침략해온 강족(羌族)을 격파했던 당대의 명장이었다.
마원이 이끄는 한나라군은 배를 타고 합포로 이동해 집결한 뒤 육로를 통해 베트남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한나라군은 베트남 국경을 넘어 식민정부의 수도였던 꼬롸 즉 지금의 하노이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진격로 주변의 여러 성들이 막상 한나라의 진압이 시작되자 전의를 상실했던 것이다.
한나라군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거친 자연환경이 더 큰 장애였다. 베트남의 길은 한발씩 내딛기조차 힘이 들었다. 마원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곳 사람들은 북쪽 중국인에 비해 개화가 덜 되었다. 대부분의 땅이 개발이 안 되어 늪과 정글을 파헤쳐야만 행군이 가능했으며, 자주 수백 마리씩 떼를 이룬 야생 코끼리와 들소를 만났다.”
한나라군은 꼬롸 부근에서 처음으로 반란군과 교전한 뒤 동쪽 랑박으로 후퇴해 진을 쳤다. 반란군의 세력이 커서 바로 전면전을 벌였다가는 자신들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이미 우기가 시작돼 극심한 더위와 습기로 더이상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베트남 북부의 우기는 하루 한두 번 열대성 스콜이 쏟아지고 끝나는 남부지방 날씨와도 다르다. 폭우가 내리다 보슬비로 변했다를 반복하며 쉬지 않고 빗방울이 떨어지며 습기를 빨아들인 공기는 축축해져 앞산의 풍경들을 뿌연 안개 속에 파묻는다. 여기에 기온이 매일 30도를 넘어가니 가만히 밖에 있어도 습식 사우나에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익숙지 않은 이방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날씨이고 진중의 비위생적인 환경까지 더해지면 각종 전염병이 창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원은 다시 이렇게 기록했다. “전염병이 널리 퍼지고, 맹렬한 더위는 참기 어렵다. 더위 때문에 매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이전이나 이후에 베트남을 침략했던 수많은 중국 군대가 겪은 고난이었다. 훗날 베트남의 명장들은 이 같은 악천후와 진흙펄에 고립된 적의 곤경을 반전의 계기로 만들었지만, 쯩짝은 그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고 흘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