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8. 11:12ㆍ카테고리 없음
베트남에게는 고통의 기간이었지만, 당나라는 중국 역사의 황금기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다. 당은 중앙아시아까지 넓힌 영토와 모든 민족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성, 유럽까지 이어지는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융성한 문학과 예술을 향유했다.
특히 6대 황제 현종은 정치세력 간 균형을 이루고, 민생안정을 꾀하며, 병역제도를 정비해 대외 원정에 성공하는 등 ‘개원의 치’라 부르는 중흥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종이 말년에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팽개치면서 안녹산의 난이라는 대란을 초래했다.
이후 당나라에서는 지방 절도사 세력이 황실을 옥죄고 궁정에서는 환관들이 발호해 황제를 세우거나 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문란한 정치는 토지 겸병을 불러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분노를 모아 일어선 황소의 난은 비틀거리던 당 왕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황소의 부하로 있다 배신해 절도사가 된 주전충이 정권을 장악했고, 황소의 난을 진압한 돌궐족 이극용 등 다른 절도사들도 각자의 근거지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천하를 도모했다. 중원의 패권 다툼이 극에 달하면서 변방 이민족들에 대한 통제가 급속히 와해되어갔다.
황소의 난이 한창일 때 베트남 다이라 즉 지금의 하노이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쫓아냈다. 그리고 다이라 인근의 토착 유지였던 쿡트어주(曲承裕)가 혼란을 수습하고 베트남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쿡트어주는 오랫동안 실력과 명망을 쌓아온 가문 출신이어서 큰 충돌 없이 당나라의 권력을 대체했다. 당 왕조는 몇 차례나 베트남 절도사를 임명했는데 모두 제대로 부임하지 못하거나 얼마 못 버티고 해임되었다. 결국 당 황제는 베트남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을 실제로 통치하면서도 쿡트어주는 아직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식이 명확하지 않았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따르면 쿡트어주는 서기 906년 당 황제에게 자신을 절도사로 제수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았다. 사실 거부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당나라는 서기 907년 절도사 주전충이 강제로 양위를 받아 후양(後粱)을 세우면서 멸망했다. 이를 시작으로 중국은 화북에 5개 왕조, 화남에 10개 왕조가 교체되는 오대십국의 극심한 혼란기에 들어갔다.
우선 주전충과 이극용의 필생의 경쟁이 대를 이어 계속됐다. 주전충의 아들들이 천자 자리를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유혈극을 벌이는 사이 복수의 칼을 갈아온 이극용의 아들이 후당(後唐)을 세운 뒤 기병대를 앞세워 개봉을 점령하고 후양을 멸망시켰다.
그 사이 베트남에서는 쿡트어주가 죽고 그의 아들이 후양 황제로부터 역시 절도사로 임명돼 지배권을 세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