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9. 09:12ㆍ카테고리 없음
베트남이 중국의 혼란기를 맞아 응오꾸엔 같은 천재적인 전략가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은 독립을 위한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건장하여 어릴 적부터 장수로 촉망받았고 지력과 담력까지 겸비한 인물이었다.
응오꾸엔의 아버지 역시 유력한 지방 호족으로 독립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응오꾸엔은 33살에 즈엉딩응에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남한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즈엉딩응에는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즈엉딩응에는 응오꾸엔을 계속 승진시켜 아이주의 통치를 맡겼는데, 그곳은 즈엉딩응에의 고향이자 군사력의 기반이었다.
양아버지 즈엉딩응에를 암살한 끼에우꽁띠엔은 처남 응오꾸엔이 봉기하자 위협을 느끼고 남한에 스스로 신하가 될 것을 청하는 매국적인 행동을 했다. 끼에우꽁띠엔이 구원을 요청하자, 그렇잖아도 재침략 기회를 노리던 남한의 유엄은 아들 유홍조를 베트남의 왕으로 봉하고 바다와 육지 두 갈래로 나누어 침략에 나섰다.
먼저 유홍조가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바다와 강을 통해 들어가 교두보를 확보하면, 국경에 대기하고 있던 유엄이 육로로 진군해 합류한다는 계획이었다. 남한의 신하들 가운데는 비가 계속 내리고 뱃길이 멀고 험하며 응오꾸엔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원정에 반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유엄은 이를 일축했다.
강대한 남한의 침략 앞에 베트남은 그나마 세력이 둘로 나뉘어 있어 절대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응오꾸엔은 허를 찌르는 대담한 작전으로 적들의 각개격파에 나섰다.
응오꾸엔은 빠른 속도로 북진해 다이라 즉 지금의 하노이에 주둔하고 있던 끼에우꽁디엔의 군대를 기습해 궤멸시켰다. 그 다음 군대를 하롱베이에 있는 바익당 강 기슭에 매복시키고 남한군이 강을 거슬러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응오꾸엔은 먼저 강바닥에 나무기둥 수천 개를 박아놓았다. 베트남군의 배는 상대적으로 작고 물에 잠기는 흘수가 얕았다. 남한의 수군이 나타나자 응오꾸엔은 전투를 벌이다 패해 달아나는 듯 위장해 남한군을 강 상류로 유인했다.
남한군이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조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자 거짓 도망하던 베트남 수군이 뱃머리를 돌려 반격했다. 이와 동시에 강가 풀숲에 염초와 건초더미를 준비하고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화공으로 남한군을 공격했다.
강바닥 기둥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남한의 전선 수백 척이 불에 탔고, 남한의 병사 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응오꾸엔은 끝까지 추격해 유홍조를 붙잡아 죽였다.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엄이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면서 남한의 베트남 공략은 실패로 끝났다.
「대월사기전서」는 응오꾸엔의 승리를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응오 왕께서 군사를 모아 유홍조의 수십만 군사를 물리치고 개국하시어 북방인들로 더이상 남진을 못하게 하셨다. 화를 내심은 민을 안위함이요, 뛰어난 지략은 적을 단번에 물리치기 위함이시라. 왕이라 칭한 채 비록 칭제를 안 하시고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 대월의 정통을 확연히 재연하지 않으셨는가.”
938년 바익당 강 전투의 승리는 천 년 넘게 이어져왔던 복속의 사슬을 끊어 베트남인들이 그토록 염원해온 해방의 꿈을 이루어냈다. 응오꾸엔은 바익당 강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해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때까지 베트남 지배자들이 썼던 절도사라는 호칭을 버린 것이다. 또한 수도를 식민통치의 중심지였던 다이라에서 기원전 3세기 안즈엉 왕이 어우락의 도읍으로 삼았던 꼬롸로 옮겨 자주의식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