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1. 09:51ㆍ카테고리 없음
해방의 환희가 잦아든 뒤 찾아온 베트남의 현실은 꿈꾸어왔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응오꾸엔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율령들을 잇달아 공포했다.
그러나 문무관직과 각종 의식, 관리들의 복제까지 중국 것을 거의 모방하다시피 했다. 정치적 예속은 극복했지만 스스로 통치체제를 정립할 역량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불완전한 국가 통합과 이로 인한 혼란이었다.
중국의 분열을 틈타 베트남 각지에서 세력을 키워온 군벌들은 어제까지 동료 장군이었던 응오꾸엔에게 존경심을 보일지언정 왕조에 충성하는 것에는 주저했다. 군벌들은 응오 왕조가 수립된 뒤에도 각자의 군사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왕권을 위협했다.
비엣족 거주지 밖의 소수민족들은 사실상 독립 상태로 중앙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불과 개국 6년 만에 응오꾸엔이 숨지자 그의 권위에 의존해왔던 왕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응오꾸엔은 죽기 전에 처남 즉 즈엉딩응에의 아들인 즈엉땀카에게 자기 아들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즈엉땀카는 아버지가 암살된 뒤 매형이 자기를 제치고 후계자가 된 데 불만을 품으면서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즈엉땀카는 일단 응오꾸엔의 장남이 왕위를 잇는 것을 지켜보다 기회를 노려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변변한 군사적 경력도 없는 그가 건국의 영웅 응오꾸엔의 혈통을 무너뜨린데 대해 집권층 내에서 반감이 일었다. 즈엉땀카는 부랴부랴 응오꾸엔의 차남인 응오쓰엉반을 양자로 들여 장차 후계자로 키우겠다고 내세웠다.
응오쓰엉반은 외삼촌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즈엉땀카는 시간이 흐르며 조카가 현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믿기 시작했다. 고금의 많은 권력자들이 자신은 남들과 다를 것이라 착각하며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데, 즈엉땀카 역시 배신을 저지르고도 거꾸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 과신했던 것이다.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즈엉땀카는 응오쓰엉반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맡겨 진압하라고 보냈다. 응오쓰엉반은 수도에서 벗어나자마자 부하 장군들을 설득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번에는 즈엉땀카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응오쓰엉반은 왕위에 오른 뒤 곳곳에서 이어지는 반란에 힘겨워하다 중국 남한(南漢)에 신하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손쉽게 안정을 도모하려 한 것이지만, 이 매국 행위로 응오 왕조의 권위는 더욱 땅에 떨어졌다.
응오쓰엉반은 얼마 뒤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했다.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배를 타고 강 위에서 구경을 하다 복병이 날린 화살에 맞았는데 약삭빠르게 살아온 그다운 최후라고 할 것이다.
응오쓰엉반의 사후 베트남은 각지의 군벌들이 권력을 향해 총궐기해 이른바 ‘십이사군(十二使君)의 난’이라는 대란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