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丁) 왕조, 의문의 종말

2021. 5. 23. 00:3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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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공고해만 보이던 딘 왕조는 내부의 균열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딘보린의 장남 딘리엔은 통일전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 누구나 그가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딘보린이 갑자기 막내아들 딘항랑을 태자로 책봉했다. 이때 항랑의 나이는 아무리 많아도 다섯 살이 채 안 되었다.

 

이제는 노인이 된 딘보린이 불손한 장남에 대한 불만과 늦동이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판단이 흐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장차 자신의 미래마저 걱정하게 된 딘리엔은 분노했다.

 

이때부터 딘 왕실에는 이해하기 힘든 비극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베트남 사서들은 979년 딘리엔이 부하들을 보내 태자 딘항랑을 암살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참사가 벌어진 뒤에도 딘보린이 장남의 반역을 처벌하거나 딘리엔이 권력을 장악하고 아버지를 유폐했다는 기록 없이 두 사람이 계속 호아루의 궁전에 기거했다.

 

대월사기전서는 딘리엔이 동생 딘항랑을 죽인 이유에 대해 딘항랑이 충효심이 없어 아버지와 형들을 잘 모시지 않고 나쁜 마음을 품으며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용이 없어 나라와 왕실을 바로 세우기 위해 거사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 다섯 살 동생을 죽인 이유로는 너무 터무니없다.

 

반면에 딘리엔이 자신의 행동을 속죄하고 동생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재 100개에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새겨 탑을 쌓도록 명령했다고 하는데, 1986년 호아루의 황롱 강변에서 태자 딘항랑의 시호가 새겨진 석재들이 발견되면서 역사 기록이 완전 날조되지는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역사의 진실이 사서의 행간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해가 다 가기 전에 호아루의 궁전에서는 미스터리 같은 유혈사태가 또 벌어진다. 딘리엔 황제를 가까이 모시던 환관 중에 도틱이라는 자가 있었다.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도틱이 어느 날 별이 자기 입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이 나라를 얻는 계시라고 생각하고 왕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도틱은 궁전 연회가 끝난 뒤 만취해 잠든 딘보린을 죽이고 이어 장남 딘리엔까지 살해했다.

 

호아루에 있는 딘보린 사당
호아루에 있는 딘보린 사당

왕이 서거했다는 급보를 들은 응우옌박 장군은 즉시 군사들을 이끌고 대궐로 진격해 반란의 무리를 소탕했다. 호아루 출신의 응우옌박은 일찍이 딘보린 휘하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전공을 세워 통일 뒤 정국공 즉 지금의 국무총리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반격이 시작되자 도틱은 궁궐 깊은 곳 궁녀들의 처소로 달아나 숨었다. 그러기를 사흘, 목마름에 시달리던 도틱은 때마침 비가 내리자 건물에서 나와 손으로 빗물을 받아 마시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군사들에게 체포돼 참수당했다.

 

허망한 반란이었고 그만큼 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남아 있다. 환관이 꿈을 잘 꾸었다고 왕이 되려 했다는 이야기도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도틱이 딘보린을 죽인 뒤 어떻게 정권을 잡을지 전혀 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대궐 안에 숨어 무언가 상황이 바뀌기만 기다리다 결국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도틱의 국왕 시해에는 배후에 다른 거물급 인사가 있었을 것으로 현대 사학자들은 추정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지금의 합참의장 격인 십도장군 레호안(黎桓)과 딘보린의 다섯 황후 중 한 명인 두옹반응아(楊雲娥) 두 사람이었다.

 

레호안은 국왕이 시해된 직후 군대를 출동시키는 데 소극적이었으며, 두옹반응아는 이제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자인 딘또안(丁璿)의 어머니였다. 두 사람은 최소한 딘보린이 시해된 이후에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이 때문에 후세의 베트남 유학자들에게 맹비난을 받았다.

 

응우옌박과 레호안 등 중신들은 만장일치로 딘또안의 즉위에 합의했다. 그런데 이제 여섯 살에 불과한 딘또안 황제의 어머니 두옹반응아가 레호안 장군을 섭정으로 지명하면서 권력의 추가 급격히 레호안으로 기울었다. 레호안은 스스로를 부왕(副王)이라 칭하고 국가 요직을 재빨리 자기 측근들로 채워나갔다.

 

딘보린 사당의 용조각 제단
딘보린 사당의 용조각 제단

딘 왕조의 공신들은 얼마 전까지 자신들의 하급자였던 레호안이 최고 권력자가 되어 왕권마저 위협하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응우옌박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레호안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선왕 딘보린이 육성해놓았던 중앙군이 대부분 레호안 지휘 아래 있었고, 명문귀족이나 학자들 눈에 시골의 무지한 장사처럼 보였겠지만 레호안은 천부적인 군사전략가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타잉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공신들의 군대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참패했다. 더이상 가릴 것이 없어진 공신들은 남쪽 참파 왕에게 지원을 요청해 연합군을 구성했다.

 

연합군은 참파의 군선에 타고 황롱강을 거슬러 올라가 수도 호아루를 직격하려 했지만 레호안 군에게 화공을 당해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딘 왕조의 충신인 응우옌박은 포로로 잡혀 레호안에게 반역의 부당성에 대한 질책까지 들은 뒤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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