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4. 00:10ㆍ카테고리 없음
베트남이 내란에 빠지자 북쪽에서 송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송은 딘 왕조와 우호관계를 유지해왔지만 베트남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광서옹주지사 후인보가 수도 개봉에 베트남의 혼란상을 보고하고 “이는 하늘이 준 기회이니 놓쳐서는 안 된다”는 ‘취교주책(取交州策)’을 올렸다. 송 태종은 대단히 기뻐하며 후인보를 총사령관으로 한 베트남 침공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송나라 초기의 복잡한 정세가 작용해 원정군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후인보는 개국공신이자 정계 거물인 조보의 여동생 남편이었다. 조보는 후주의 장군이었던 조광윤의 쿠데타를 기획했고 조광윤이 황제가 되자 재상에 올랐던 인물이다.
조보는 그러나 지나치게 독선적인 성격 탓에 관리들의 원성을 사고 황제의 눈밖에 벗어나 당시 실각한 상태였다. 대신 정권을 쥔 노다손이 조보의 일파를 견제하면서 후인보를 멀리 남쪽 광서성 지사로 보낸 뒤 임기 3년이 훨씬 넘도록 근무지를 바꿔주지 않았다.
노다손은 태종이 ‘취교주책’을 읽어보고 기뻐하며 후인보를 불러 자세한 전략을 들으려 하자 이를 극구 말렸다. 후인보가 수도 개봉에 와서 태종의 환심을 사고 자칫 베트남 원정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채 요직에 눌러앉을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노다손은 태종에게 “후인보를 부르시면 필시 기밀이 새나갈 것입니다. 후인보에게는 빨리 군량을 모으도록 하고, 인근 호북성과 안휘성에서 사졸 일이만 명을 차출해 보내면 충분할 것입니다”라고 진언했다. 태종이 들어보니 과연 그럴 듯하여 후인보를 전쟁물자 조달 책임자로 임명하고 남부 일부 주에서 군대를 모아 그에게 보냈다.
이제 막 대륙을 통일한 송나라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총력전을 선택했다면 베트남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쟁에 영향을 받고 참전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 노다손의 근거 없는 낙관론 때문에 원정군 규모가 너무 작아지고 말았다.
송나라가 침략해오자 베트남 집권층은 왕조 교체를 서둘렀다. 송나라군이 몰려온다는 급보가 빗발치는 가운데 레호안의 부하 장수들은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데 어찌 어린 황제로 이를 수습하겠는가?”라며 레호안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레호안의 집으로 몰려가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다.
레호안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라며 짐짓 사양했다. 그러자 황제의 어머니인 두옹반응아가 사람을 보내 황포를 올리며 레호안을 간곡히 설득해 마침내 승낙을 얻는 모양새를 갖췄다. 급히 양위식을 열어 레호안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티엔푹(天福)으로 정했다. 서기 980년의 일이다.
이로써 딘 왕조는 12년 만에 막을 내렸으며 딘또안 황제는 위왕(衛王)으로 다시 강등됐다. 딘 왕조의 충신들에게는 통탄할 일이지만 왕족에 대한 학살이 수반되었던 다른 왕조 교체와는 달리 평화적인 양위가 이루어지고 딘 왕조 마지막 황제의 안전도 보장됐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