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5. 00:25ㆍ카테고리 없음
980년 여름 송나라군 3만 명이 국경을 넘었다. 후인보가 이끄는 중군은 해안을 따라 이동하다 하롱을 지나 바익당 강 동쪽 기슭에 도착했다. 여기서 후인보는 좌군에 해당하는 수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송나라 우군은 손전흥의 지휘 아래 베트남 동북부 국경인 랑선을 통과해 치랑에 당도했다. 베트남군이 이들을 막아 보려 했지만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연전연패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송나라군은 중군 · 우군과 수군을 한데 모아 지금의 하노이인 다이라를 먼저 점령한 뒤 수도 호아루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징 제독의 수군이 바다를 거쳐 바익당강을 거슬러 북상하려고 했지만 강어귀에서 저지됐다. 사서는 이를 송의 군선들이 강바닥에 박아놓은 말뚝에 걸려 멈추었다고 기록했는데, 베트남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
바익당강은 고대에 ‘숲의 강’이라 불릴 정도로 강 양측 특히 왼쪽에 깊은 삼림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 군사들을 매복시켜 올라오는 선단을 불화살로 공격한다면 자칫 송 수군이 대규모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또한 북쪽의 손전흥은 후인보가 여러 차례 전령을 보내 남하하라고 독촉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사서에 손전흥이 수군과 합류하지 못해 이동하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은 베트남군 저지로 남하하지 못한 손전흥이 수군에게 올라와 강을 통해 부대를 이동시켜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육군도 이동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수군더러 좁은 강을 거슬러 올라와 자기들을 태우고 가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고 현실성 없는 주장이었다.
그해 겨울 어느 날 송나라 수군이 밀물로 강의 말뚝들이 깊이 잠겨 있을 때 강한 순풍을 이용해 베트남 수군 저지선을 뚫고 마침내 북상하는 데 성공했다. 그날 송 수군은 베트남의 군선 200척을 빼앗고 병사 1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후인보는 무려 70여 일을 기다린 끝에 수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제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고 도강 장비까지 갖추게 된 후인보는 아직 북쪽에서 못 내려오고 있는 손전흥의 부대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비록 후인보가 참전 경험이 없는 문신이기는 했지만 아직 송나라군의 전력은 대등한 조건이라면 베트남군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했다. 게다가 홍강 삼각주의 거미줄처럼 얽힌 강들을 건널 때 수륙 양동 작전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송군은 파죽지세로 베트남 영토를 파고들었다.
남쪽 후인보의 주력군은 레호안이 직접 막고 있었다. 전면전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느낀 레호안은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는 뜻을 적은 편지를 보냈다.
당시 후인보는 옛 수도 다이라에 거의 근접한 홍강 유역 떠이껫까지 진출해 있었다. 후인보는 그곳에서 군선을 타고 레호안이 항복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군대가 강가에 주둔하면 내륙보다는 진의 폭이 좁아져 지휘부가 쉽게 노출되는데다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한 송나라 병사들이 경계를 게을리했다. 그 틈을 노려 베트남군은 한밤에 전 병력을 동원해 강을 건너 송나라군 진영을 급습했다.
일대 혼전이 벌어졌고 배에서 자고 있던 총사령관 후인보는 그만 피신하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전쟁의 판도가 일시에 바뀌었다.
후인보의 부장 진흠조가 겨우 병력을 수습해 동쪽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백전노장 레호안이 간신히 잡은 승기를 그냥 날려버릴 리 없었다.
베트남군은 신속하게 추격해 송나라 중군에 거의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육군과 헤어진 수군은 더이상 전장에 머물 수 없어 그대로 홍강을 타고 내려가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손전흥의 우군은 난처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손전흥의 부대는 찌린까지 진출해 있었다. 베트남군 주력이 후인보의 중군 쪽에 몰려 있고 손전흥 쪽에 대해서는 남하해 두 부대가 합류하는 것을 막는 정도였기 때문에 진격이라기보다는 베트남군 저항이 적은 서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찌린에서 두옹 강만 건너면 다이라까지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중군은 사라지고 수군마저 철수한 상황에서 우군만으로 진격하다가는 기세가 오른 적에게 전멸당할 위험이 컸다. 더구나 풍토병으로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갔다.
손전흥은 군대를 조금 움직이다가 적을 찾을 수 없다는 구차한 이유를 대며 철군을 결정했다. 그로서는 패배한 것은 자기가 아닌 후인보이며 우군만으로 정벌의 목적을 이룰 수 없으니 누구나 자신의 철군을 이해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손전흥은 지휘관에게 전쟁의 승패가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그에게 군대 지휘권을 부여한 것은 베트남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었지 패전의 변명을 듣기 위한 게 아니었다.
분노한 송태종은 먼저 사자를 보내 수군 지휘관들을 체포했는데, 유징은 병을 얻어 죽고 다른 부장들은 옹주 시내에서 처형됐다. 순전흥이 패잔병을 이끌고 수도 개봉에 도착하자 감옥에 가둔 뒤 심문해 죄를 자백받고는 역시 처형했다. 반면에 전사한 후인보에 대해서는 태종이 깊은 애도를 표하고 공부시랑을 추증했으며 두 아들에게도 관직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