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력을 회복한 송나라의 재침 준비

2021. 5. 31. 00:06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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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리 태조가 사망한 1028, 지방의 왕으로 봉해져 있던 세 왕자가 맏형인 태자에게 도전해 군사를 일으켰다. 군부의 도움으로 이를 겨우 진압하고 태자가 즉위했는데, 그가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왕권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참파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조공을 하지 않는다는 외교 문제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무력을 과시해 국내 제후들의 신복을 받으려는 목적이 더 컸다.

 

태종에 이어 성종(聖宗)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성종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참파를 공격해 꽝빈과 꽝찌 두 성을 할양받았다. 이때부터 베트남 영토의 남진이 시작됐다.

 

성종이 사망하고 겨우 일곱 살인 태자가 즉위했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아무런 잡음도 없었다. 그만큼 리 왕조 초기 황제들의 노력으로 왕권의 토대가 탄탄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부에서 문제가 생겼다.

 

송나라의 베트남 정세 분석과 재침 결정
송나라의 베트남 정세 분석과 재침 결정

주변국에 대한 간섭을 자제하던 송나라가 재상 왕안석(王安石)의 개혁정책으로 경제와 국방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더니 다시 영토 확장을 꾀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에 어린 임금이 즉위하자 중국의 국경 관리들이 이 기회에 베트남을 병합하자는 표문을 올렸다.

 

중국 관리들은 그 직전에 있었던 베트남의 참파 원정 실패를 보고하면서 베트남 병사들이 채 1만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과장된 정보를 덧붙였다. 강서성 출신으로 늘 남부 정세에 관심을 기울여온 왕안석도 베트남 정벌론에 동조했다. 특히 그는 막대한 금 매장지이자 소수민족인 눙족이 중국과 베트남 양쪽에 애매하게 복속하고 있던 국경지역 분쟁을 해결하기 원했다.

 

신하들의 건의가 이어지자 송의 젊은 황제 신종(神宗)은 남정을 명령했다. 다만 베트남이 미리 알아차려 저항할 준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하게 단속했다. 송의 남부 각주에서는 장정들을 징집하고 군함을 만들어 훈련하는 한편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베트남과의 국경 통행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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