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 00:31ㆍ카테고리 없음
송나라에 왕안석이 있었다면 베트남에는 리트엉끼엣(李常傑)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응우옌뚜언이다.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17살 때 기병 장교로 임관한 뒤 승진을 거듭해 국왕경호대장이 되었다.
뛰어난 용맹과 지략과 충성심을 겸비한 그는 왕실의 성(姓)을 하사받아 리트엉끼엣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모든 조정 신료들로부터도 깊은 신뢰를 받았다. 성종(聖宗)이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자 대비가 섭정을 했지만 국가의 주요 정책은 리트엉끼엣이 사실상 모두 결정했다.
리트엉끼엣은 송나라에 보내놓았던 첩자들로부터 광서성 성도인 옹주(邕州)를 비롯해 중국 국경도시들에 병력과 물자가 집결하는 등 수상한 움직임이 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송의 침략이 예정된 것이라면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적의 전력을 약화시켜 놓겠다는 의도였다.
약국이 강국을 공격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베트남 조정에서 반대가 적지 않았지만, 최고 권력자였던 리트엉끼엣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075년 말 베트남은 그동안 공들여 육성해온 10만 병력을 총동원해 북진을 결행했다.
먼저 육군이 세 갈래로 나뉘어 광서성 옹주를 향해 진격했다. 깜짝 놀란 송나라군이 병력을 모아 대항했지만 이는 베트남군의 기만공격이었다. 리트엉끼엣은 직접 군 주력을 이끌고 바닷길로 돌아 광동성 흠주에 상륙한 뒤 염주를 초토화시키고 옹주에서 다른 부대들과 합류했다.
군사요충지답게 옹주성 군민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송나라 조정이 보낸 군대가 리트엉끼엣의 매복 공격에 패해 물러났고, 주변의 다른 성들은 자체 방어 준비에만 급급할 뿐 옹주의 지원 요청을 외면했다.
결국 옹주는 40일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베트남군은 각지에 쌓여있던 군수물자를 불태우고, 주민과 병사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다음 해 3월 개선했다. 이 공격은 베트남이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을 침략한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