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없는 송나라의 2차 침략

2021. 6. 2. 19:51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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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세 개 도시가 유린당한 사실에 송나라 조야는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송 신종은 즉시 곽달(郭達)을 토벌군 지휘관으로 임명해 베트남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송나라는 먼저 참파 및 크메르와 동맹을 맺어 베트남을 남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하도록 했다. 다만 사서에는 두 나라가 베트남 공격에 적극 참여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비록 두 나라가 베트남과 적대적이기는 했지만 중국이 베트남을 정복한 뒤에도 자신들과 계속 우호관계를 이어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보다는 두 강국이 싸워 서로 쇠약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1076년 송나라의 2차 베트남 침략
1076년 송나라의 2차 베트남 침략

1076년 송나라 대군이 베트남 국경을 넘었다. 탕롱을 향해 진격하던 송나라군은 느응우옛강 즉 지금의 꺼우강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병력의 수를 앞세워 그대로 밀고 내려가 홍강 유역에 도착했다. 이제 강 하나만 건너면 탕롱 즉 지금의 하노이였다.

 

리트엉끼엣은 근처의 모든 배들을 긁어모아 4백 척을 강 서안에 정박시켜놓고 송군의 도강 시도를 막았다. 송군이 뗏목을 엮으면 물은 건너겠지만 강 위에서 수전에 능한 베트남군과 맞붙었다 자칫 대참사를 당할 수 있었다.

 

송군 지휘관들이 머뭇거리면서 양측의 대치는 한 달 넘게 계속되었고, 송나라 병사들은 점점 지쳐갔다. 이 틈에 베트남군이 일제히 강을 건너 송군 진영을 기습했고, 송군은 1천 명이 넘는 병사들을 잃고 황급히 후퇴했다.

 

공격 전에 리트엉끼엣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수백 년 전 독립투사의 사당에 바친 뒤 진중에 퍼뜨려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요즘 일부 가수들이 일부러 음원을 유출시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듯이, 병사들에게 호기심을 갖도록 해 스스로 따라 부르게 한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이 시를 베트남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여긴다.

 

南國山河南帝居, 截然定分在天書

如何逆虜來侵犯, 汝等行看取敗虛

(남국의 산하에는 남제(南帝)가 있다고

하늘의 책에도 분명히 쓰여 있는데

어찌하여 역노는 이 땅을 침범하는가.

너희들은 참담한 패배를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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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병사들의 자질이나 무기가 뒤떨어진 게 아니었다. 훗날 송나라군은 순창에서 2만의 병력으로 금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했고, 역사상 최강이라는 몽골의 침략에도 40년 이상 저항하며 숱한 승패를 주고받았다.

 

문제는 누가 그들을 지휘하느냐였는데, 베트남을 침공한 곽달 등 송나라 지휘관들에게는 상황을 반전시킬 지혜와 능력이 없었다. 돌아갈 수는 없고 베트남군을 공격할 용기도 잃은 송군은 하릴없이 시간만 보냈고, 굶주림과 무더위로 많은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베트남으로서도 자국 영토 안에서의 전쟁을 오래 끌 수가 없었다. 리트엉끼엣은 송나라에 철군 명분을 주기 위해 송군이 이미 점령하고 있던 국경지대 5개 주를 할양하겠다는 그럴듯한 협상안을 제시했고, 송나라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송군이 철수하자마자 그 중 3개 주를 되찾았다. 2년 뒤 베트남이 코끼리 10마리를 조공으로 바치면서 나머지 2개 주를 돌려달라고 간청하자 송은 이전에 베트남이 침략해 잡아간 자국인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양국이 모두 약속을 지키면서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이는 송이 북방에 요를 대신해 들어선 금과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더이상 베트남을 적국으로 삼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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