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강을 이룬 왕조교체

2021. 6. 7. 15:02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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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투도는 신속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왕위 찬탈을 성공시키며 가문 내 영향력을 키워갔다. 그는 8살 난 조카 쩐까잉(陳煚)을 궁궐에 들여보내 여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도록 했다.

 

장차 왕으로 세울 후보로 명목상 가문의 수장이었던 쩐트아의 둘째 아들을 선택하고 자신이 직접 왕위를 욕심내지는 않았다. 쩐씨 일족의 단합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은 군대를 장악한 자에게 있는 것이니 자리의 이름에 크게 연연할 바도 아니었다.

 

쩐투도는 어느 날 두 사람이 공놀이를 하다 여왕이 쩐까잉에게 공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베트남 풍속에 여자가 남자에게 물건을 던지는 것은 청혼을 의미한다고 억지를 부려 둘을 결혼시킨 뒤 곧바로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했다. 1225년의 일이다. 200여 년을 지속해온 베트남 최초의 장기 왕조는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리왕조 왕궁 지붕 장식 유물
정교하고 아름다운 리왕조 왕궁 지붕 유물 (하노이 왕궁 박물관 소장)

아들이 왕이 되자 쩐트아는 태위에서 물러났지만 자신이 섭정이 되어 최고 권력을 휘두르게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태위 자리까지 차지한 쩐투도의 권력은 더욱 막강해졌고 쩐트아는 어느새 뒷방 늙은이로 밀려난 자신의 처지를 발견했다. 쩐왕조의 시조가 된 쩐까잉 즉 태종(太宗)마저 쩐투도를 국부(國父)’라고 부를 정도였다.

 

왕조의 교체는 희극처럼 이루어졌지만 새 왕조의 기반을 굳히는 작업은 피가 강을 이루는 가운데 진행됐다. 쩐투도는 퇴위한 뒤 절에 들어간 있던 혜종에게 자살을 강요했고 수많은 리씨 왕족들을 살해했다.

 

살아남은 왕족들은 응우옌씨로 개명하도록 해 왕조 부활을 아예 꿈도 꾸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지방에서 몇 건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쩐투도는 군대를 보내 수년에 걸쳐 완전히 진압했다.

 

쩐투도는 천륜에 어긋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아 훗날 사가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태종이 결혼 10년이 넘도록 아이를 얻지 못하자 쩐투도는 조바심이 났다. 왕의 후계가 불분명하면 신생 왕조의 전복을 꾀하는 자들에게 그만큼 틈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태종의 후계자는 리 왕조의 피를 이어야만 리 왕조 복원을 주장하는 자들의 명분을 봉쇄할 수 있었다.

 

리 왕조의 마지막 공주가 둘밖에 없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왕비의 언니는 태종의 형 쩐리에우와 결혼해 아들을 낳고 금실 좋게 살고 있었다. 이들 망국의 공주와 권력에서 배제된 창업자의 종손은 세상과 담을 쌓고 오손도손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의지했다.

 

쩐투도는 그런 사정을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쩐투도는 태종을 강제로 이혼시켜 왕비를 내쫓은 뒤, 쩐리에우의 아내를 끌어다 태종과 다시 결혼시켰다. 아무리 근친혼이 자연스러웠던 고대라 하더라도 이는 태종의 형제를 왕은커녕 인간 취급도 하지 않은 처사였다.

 

쩐리에우는 몇몇 무사들을 모아 애처로운 반란을 일으켰고, 태종은 이런 왕보다는 차라리 중이 되겠다며 밤에 몰래 대궐을 빠져나와 멀리 동쪽 바닷가 꽝옌의 한 절로 달아났다. 쩐투도는 태종에게 쫓아가 환궁을 요구하다 말을 듣지 않자 조정을 아예 그 절로 옮기겠다고 협박해 겨우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쩐리에우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담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쩐리에우도 참수하려 했지만 태종이 간절히 부탁해 살려주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수치를 견디며 살아야했던 쩐리에우는 그 뒤 엄마를 빼앗긴 가여운 아들 쩐꾸옥뚜언(陳國峻)을 키우는 데 인생의 목표를 걸었다.

 

쩐투도는 쩐리에우를 기왕 살려줬으니 원망이라도 덜어볼 요량으로 엄청난 토지를 하사했다. 쩐리에우는 그 재산을 바탕으로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 쩐꾸옥뚜언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쩐꾸옥뚜언이 자라날수록 용모가 빼어나고 총명했으며 온갖 서적을 섭렵해 문무가 모두 출중했다고 사서는 기록했다.

 

리왕조 후기 왕들의 거듭된 실정으로 지배체제가 흔들리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결국 왕조가 무너져 교체되는 오랜 기간 동안 베트남의 대외관계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조용했다. 외부의 최대 위협 세력인 중국 송나라가 화북에 요나라를 대신해 들어선 금나라와 치열한 패권 경쟁을 벌이느라 딴 곳에 정신을 팔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저 멀리 북방의 몽골고원에서 한 가닥 회오리처럼 통합의 움직임이 일더니 점차 온 세상을 전화 속에 몰아넣는 광풍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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