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1. 14:56ㆍ카테고리 없음
베트남에게 중국은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면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정세 변화에 맞춰 시시각각 대응책을 세워야만 국가의 존립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런 베트남이 화북에서 벌어진 몽골과 금나라의 사활을 건 싸움을 모를 리 없었다. 아직은 수천 리 떨어진 전란이었지만 언제든 그 불똥이 남쪽으로 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베트남 위정자들의 마음속에 깃들기 시작했다. 쩐왕조는 방위력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쩐왕조는 먼저 국경지역 소수민족들을 껴안으려 노력했다. 족장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거나 족장의 딸을 왕실에 맞아들이는 혼인정책으로 유대를 강화했다. 또한 족장들에게 관직을 주고 자기 부락을 마치 식읍처럼 장악할 수 있도록 허용해 환심을 샀다. 그래도 므엉족 타이족 등 저항하는 부족들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남쪽의 참파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며 자주 국경을 침범했다. 이에 쩐왕조는 1252년 참파를 공격해 왕비와 수많은 주민들을 잡아왔다. 이전 왕조에서 취득한 영토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 몽골의 침략이 시작됐을 때 뒤로부터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몽골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베트남과 참파의 대규모 교전은 없었다. 이는 참파 역시 몽골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베트남을 방어막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양국은 왕실혼인을 통해 사돈관계를 맺었고, 이 때 할양받은 두 개 주를 제외하고 쩐왕조는 침략전쟁을 통해 참파의 영토를 획득하지 않은 유일한 왕조가 되었다.
쩐왕조는 베트남 중부 지역을 침범해 약탈하는 라오스에도 몇 차례 군대를 보내 더이상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쩐왕조의 정규군은 크게 수도를 지키는 금위군과 지방 요지를 지키는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금위군은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출동해 해당 지역의 지방군과 연합해 작전을 전개했다. 금위군은 절대적인 충성을 유지하도록 쩐씨 왕족의 출신지에서 선발했고 봉급을 지급했다. 지휘관은 왕족만을 임명했다.
지방군은 각 지역의 장정들 가운데서 뽑았는데, 평야지역에서는 정병으로 산간지역에서는 번병이라고 불렀다. 금위군의 수는 약 2만 명이었고, 금위군과 지방군을 다 합해도 그 수가 10만 명에 이르지 못했다.
이 같은 정규군 외에도 왕족들이 보유한 ‘왕후가동군(王侯家童軍)’이라 부르는 노비로 이루어진 사병들이 있었다. ‘2차 몽골항쟁 때 반끼엡에 집결한 베트남 병력이 20만 명이었는데, 동남 지방 군사들만을 모은 것이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왕후가동군’의 규모가 엄청났다.
왕족들은 전시에 사병 외에도 지방에서 군인들을 모집할 권한을 가졌다. 여기에 더해 향토방위를 위해 마을의 장정들로 구성된 방대(防隊) 즉 향군(鄕軍)이 있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마을의 치안과 질서유지를 담당하다가, 전시에는 왕족의 사병들과 함께 싸움에 가담했다.
사실상 모든 성인 남자들을 그물망처럼 촘촘히 짜인 군대 조직 어딘가에 소속되도록 만든 것이다. 대몽항쟁 때 패전을 거듭해도 끝없이 충원됐던 병력자원의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베트남 사가들이 “위기에 처하여 병사 아닌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의 항전 의지뿐만 아니라 이같이 효율적인 동원체제 덕분이기도 했다.
몽골의 침략 의사가 가시화되던 1253년 쩐왕조는 강무당(講武堂)이라는 사관학교를 세웠다. 귀족 자제들에게 전술 운용과 부대 지휘 등 군사지식을 연마시켜 뛰어난 장교들을 대량 배출했던 것이다. 이들이 몽골과의 전쟁에서 베트남군의 주축 역할을 했다.
강무당의 교육 과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훗날 쩐꾸옥뚜언이 지은 「병사요략」의 내용에 비추어볼 때 중국의 각종 병서들을 참고한 전략전술의 교리와 정신무장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사요략」은 중국의 「손자병법」을 베트남의 자연환경에 맞게 편집했는데, 책의 서문에서 전쟁을 종교적인 의무처럼 신성시하는 한편 왕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