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8. 12:02ㆍ카테고리 없음
“주나라 장왕 때 베트남에 마술로 각 부락을 제압한 기인이 있었는데, 그가 스스로 흥왕(Hùng Vương, 雄王)이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반랑으로 지었다.” 14세기에 쓴 베트남의 역사서 「월사략」에 나오는 내용이다. 중국 주나라 장왕 때라면 B.C. 7세기로 지금부터 2,700년 전이다. 학자들은 실제로 이때쯤 반랑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신기하게도 고조선의 건국 시기와 비슷하다.
흥왕이 마술로 각 부락을 제압했다는 「월사략」의 기록은 단군왕검의 ‘단군’이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과 맥이 통해 흥미롭다. 자연의 힘에 압도되고 항상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아야 했던 고대인들은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능숙한 솜씨로 신비한 현상을 만들어 보이며 그 같은 심리적 요구를 충족시켜준다면 큰 힘 들이지 않고 절대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반랑의 수도인 퐁쩌우는 지금의 하노이에서 북서쪽으로 70여km 떨어져 있었다. 중국 운남성에서 흘러내려온 홍강이 차츰 낮아지는 산들을 지나 평야지대와 처음 만나는 지점이다. 급한 강물에 실려 온 흙이 퇴적되기 시작하는 강가는 기름진 옥토가 되어 오랜 세월 전부터 인간의 정주를 유혹해왔다.
경작지로서야 그보다 하류 지역이 더 유용했겠지만, 대신 퐁쩌우에는 구비치는 야산들이 주변을 둘러싸 그 안에 터 잡은 사람들의 안전까지 담보해주는 장점이 있었다.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산속의 밀림에 몸을 숨기면 무방비 상태로 학살당하는 일을 우선 모면할 수 있었다. 또한 높지 않은 산이라 해도 위에서 아래를 보며 방어하는 것이 훨씬 쉬웠고, 반면에 적들은 산과 산 사이 비좁은 계곡에 밀집할 수밖에 없어 공격에 취약점을 노출했다.
반랑의 부락은 족장들이 통치했다. 흥왕이 이들의 대표자였다. 백성들은 벼농사를 주업으로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는데, 주변 산악지대에 살던 소수민족들이 호시탐탐 그들의 부를 노렸다. 필요한 물자를 교역으로 도저히 확보하지 못한 산악 부족이 반랑의 마을을 공격하면 흥왕은 즉시 군사를 모아 이를 격퇴하러 달려왔다. 족장들은 안보의 대가로 매년 일정한 양의 농산물을 흥왕에게 제공했다. 근처 적들의 수가 변변치 않고 문명이 뒤떨어졌을 때에는 흥왕과 족장들의 이 같은 거래가 원활하게 작동됐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이 중국 대륙에서 거대한 변화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