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2. 09:32ㆍ카테고리 없음
맹공이 이끄는 송나라군이 접근해오자 황주 인근에 진을 쳤던 몽골군은 서쪽 형주로 100km 넘게 이동해 감리현에서 도강을 준비했다. 장강 즉 양쯔강이 직선으로 길게 흐르고 양안이 모두 평야지대라 몽골군이 어느 쪽으로 건널지 송군이 예상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몽골군을 추격해 강 남쪽에 도착한 맹공은 병사들에게 낮에는 부대 깃발과 군복을 수시로 바꾸고 밤에는 수십 km에 걸쳐 횃불을 피우도록 해 송군의 병력을 부풀려 보이도록 했다. 강 건너에 엄청난 대군이 기다린다고 생각한 몽골 병사들은 겁을 먹어 사기가 떨어졌다.
그리고 송군이 강을 건너 기습하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고 달아났다. 맹공은 몽골군이 도강을 위해 만들고 있던 선박 등 각종 장비들을 불태웠고, 기세가 오른 병사들을 독려해 몽골군의 요새 24곳을 파죽지세로 격파했다.
몽골군이 다시 황강을 향해 남하해 황주가 위급해지자 송 조정은 맹공에게 이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맹공은 수군을 이끌고 황주로 향하다 몽골의 선단을 만나 이를 섬멸하고 황주성으로 들어갔다.
공포에 떨던 그곳 백성들은 “아버지가 오셨다”며 환호했다. 맹공은 수군과 야습을 과감하게 이용하고 적의 공성 전술을 미리 예상해 대처하며 수개월에 걸친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제는 전장의 풍향이 바뀌었다. 자신감을 얻은 송의 조정은 맹공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지 탈환을 위한 북진을 시작했다. 곳곳에서 송의 장군들이 몽골군을 격파했고 이때 수복한 양양은 이후 대몽 전쟁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송은 또 남침을 준비 중이던 옛 금나라 땅의 몽골 기지들을 급습해 전략물자들을 불살랐다. 방어에만 급급해오던 송군이 자신들의 후방을 공격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몽골군이 크게 낭패를 본 것이다.
서부지역의 전황은 여전히 몽골군에 우세하게 전개됐다. 80만 대군을 동원해 사천을 강타한 몽골군은 장강 위에서 벌어진 수전에서 송군을 격파한 뒤 불길처럼 남진해왔다. 맹공은 이를 막기 위해 기병대를 이끌고 급히 기주에 도착했다.
몽골군의 숫자는 송군의 10배, 정면승부로는 절대 이길 수 없었다. 맹공은 몽골군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점 몇 곳에 군대를 집중 배치해 수비를 강화하고 이에 접근하는 몽골군을 협공하도록 했다. 결국 공격하다 지친 몽골군은 송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북쪽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덧 맹공은 송나라 군대를 총지휘하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는 오고타이 칸의 사망 뒤 벌어진 몽골의 내전을 이용해 수차례 옛 금나라 땅에 군대를 보내 몽골군의 양식과 건초를 불살랐다. 송군의 선전을 보고 과거 몽골에 투항했던 송나라 장수들이 속속 다시 귀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국망의 위기에서 잠시 벗어나자 황제가 맹공의 권력 확대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송 황제 이종(理宗)은 맹공이 기뻐하며 보고한 화북의 한 유력 장군의 복귀를 ‘배반을 밥 먹듯 한 자“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화북을 뒤흔들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 맹공이 항의의 뜻으로 사직서를 제출하자 곧바로 수리해버렸다. 맹공은 좌절감 때문인지 갑자기 병이 깊어져 다음해 가을 자신이 피 흘려 지켜낸 형주의 강릉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51세, 아직은 송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어야할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