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3. 00:17ㆍ카테고리 없음
칭기즈칸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다. 몽골의 전통에 따르면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용맹한 장수였던 막내아들 툴루이 대신 현명한 셋째아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 족장들은 이를 무시하고 전통에 따라 툴루이를 새로운 칸으로 선출했다. 툴루이는 2년간 임시 칸으로 있다가 아버지의 결정을 지키기 위해 형 오고타이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오고타이에 이어 그의 장남 귀위크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몽골 제국의 제3대 칸이 되었다. 그는 현명하고 결단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지만, 정적인 바투를 굴복시키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즉위 2년 만에 병사해 어떤 업적을 남기기에는 치세가 너무 짧았다.
귀위크가 죽자 툴루이의 막내아들 몽케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 몽골의 말자상속 전통과 함께 바투 세력의 지지가 힘이 되었다. 이처럼 한동안 진행된 왕위 계승의 혼란이 가라앉자 몽골은 다시 외부로 눈을 돌렸다.
몽케 칸은 먼저 동생인 쿠빌라이를 보내 현재 중국 운남성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정복하도록 했다. 송나라 침략 재개를 위한 포석이었다.
당시 대리국은 바이족(白族)이라는 강력한 기마민족을 중심으로 300여 년을 이어온 강국이었다. 다만 각 부족을 대표하는 귀족들의 세력이 왕권을 제약했고, 나시족(納西族)의 반발 등 민족 갈등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 국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대리국 왕은 수도인 대리성을 둘러싼 창산의 고봉들을 난공불락의 방어막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제2 도시인 여강(麗江, Lijiang)의 나시족이 성문을 열고 항복한 뒤 산길을 거쳐 대리성 바로 앞까지 몽골의 대군을 안내해주었다.
대리성은 무려 1년 동안 항전했지만 결국 함락되었다. (1253년) 쿠빌라이는 그 직후 훌라구, 아릭 부케 등 몽골 내부 경쟁자들의 세력 확대가 심상치 않자 부장인 우량하타이에게 운남 주둔군의 지휘를 맡기고 중국 전선으로 돌아갔다.
몽골군 전략전술의 기초를 세웠던 명장 수부타이의 아들답게 우량하타이는 곤명(昆明, Kunming) 등 저항하는 도시와 마을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려 대리국 전역을 장악했다.
대리국 정복으로 몽골은 남서쪽에서 송을 공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또한 이것은 몽골이 드디어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