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3. 11:52ㆍ카테고리 없음
베트남은 호라즘처럼 몽골 상인들을 학살하거나 버마처럼 멋모르고 몽골을 선제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몽골과의 충돌을 피하려 필사적인 외교 노력을 펼쳤다. 그러나 베트남이 애를 쓴다고 피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몽골의 몽케 대칸은 송나라에 대한 두 번째 침략을 시작하기 한 해 전인 1257년 운남 주둔군 사령관 우량하타이에게 베트남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베트남을 점령해 남쪽에서 송을 치는 또 하나의 공격로를 확보하고 베트남 군민을 대송전쟁에 동원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량하타이는 국경에 3만 대군을 집결시켜 놓고 베트남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칠 것과 송을 공격할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을 사실상의 항복 요구로 받아들인 베트남 조정은 몽골 사신을 감옥에 가두고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베트남의 실권자 쩐투도는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군 최고사령관에 청년 장군 쩐꾸옥뚜언(陳國峻)을 임명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쩐꾸옥뚜언이 유능하고 명망 높긴 했지만 이제 겨우 25살에 불과했다.
더구나 쩐씨 정권 창업자의 적장손이자 왕비의 아들로 당장 왕위에 오른다 해도 손색이 없을 그는 쩐투도의 잠재적 정적이기도 했다. 쩐꾸옥뚜언의 가슴 속에는 억울하게 어머니를 빼앗긴 깊은 한이 도사리고 있었고, 한때 쩐투도에 대한 적개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위험인물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맡긴 것은 쩐투도의 지략이 또 한 번 빛난 결정이었다.
쩐 왕조의 창업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재산을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의 씨앗이 뿌려졌다. 극단적인 부의 집중과 인적 물적 징발체제의 강화는 백성들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백성들은 궁핍했던 고대사회의 일상적인 고통마저 절대 권력자 쩐투도에게서 책임을 찾으려 했다.
쩐투도는 모두에게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쩐씨 일가 밖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비록 왕족이지만 쩐투도의 대척점에 선 쩐꾸옥뚜언에게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은 쩐꾸옥뚜언이 언젠가는 쩐투도를 타도해 부모의 원수를 갚고 이 땅에 정의를 세울 것이라고 마음대로 상상하며 위안을 얻었다.
그런 쩐꾸옥뚜언이 군대의 선두에 서는 것보다 군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충성과 자발적 희생을 이끌어내는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만 실질적인 군 통수권은 쩐투도가 쥐고 있었으며, 쩐꾸옥뚜언이 칼끝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도록 몇 겹의 안전장치를 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