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5. 10:53ㆍ카테고리 없음
몽케 대칸은 1258년 송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그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쪽 사천성 공략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과거 최대 격전지이었던 호북성 무창 방면은 둘째 동생인 쿠빌라이, 운남에서 올라오는 별동대는 현지 주둔군 사령관인 우량하타이가 지휘하도록 했다.
몽골의 대군이 남하하자 사천성의 대다수 성들은 겁에 질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그러나 쾌속 진격하던 몽골군은 이번에는 오늘날의 중경 북쪽에 있는 조어성(釣魚城)에서 제동이 걸렸다.
조어성은 양쯔강의 세 지류가 만나는 지점의 험준한 절벽 위에 쌓은 산성이었다. 몽골군은 성의 삼면을 포위한 뒤 동서 양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조어성의 군민 10만 명이 왕견(王堅)의 지휘 아래 똘똘 뭉쳐 몽골의 공격에 대항했다. 왕견은 몽골의 1차 침략 때 명장 맹공의 부장으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운 장수였다.
조어성은 방어에 유리한 여러 가지 조건을 갖췄다. 넓은 외성 안에 논밭과 풍부한 물이 있어 식량을 얼마 정도는 자체 조달할 수 있었다. 몽골군에 쫓긴 피난민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어 병사를 징발할 인력자원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성 남쪽이 강과 맞닿아 있어 이곳을 통해 식량과 무기를 계속 보급받았다. 아직까지 양쯔강은 송나라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 병사들은 무려 200차례가 넘는 몽골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포위 기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전략물자가 넉넉한 조어성은 다급할 게 없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몽골군을 향해 물고기 꼬리와 밀가루 떡을 던지며 “우리는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몽골군 장군들 가운데는 조어성 주변에 소수의 병력만 남겨두고 주력은 양쯔강을 따라 이동해 송의 수도로 진격하자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된 대다수의 몽골 장군들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성을 함락시키고 가자고 고집했다.
그러나 여름이 되자 북방의 사막에서 온 병사들에게 견디기 힘든 더위가 시작됐다. 위생 상태마저 불량한 몽골군 진영에는 감기와 이질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다.
몽케 대칸마저 이질에 걸려 쓰러지자 몽골군은 5개월 만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1259년 7월) 몽케는 그 직후 진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몽골군은 일단 송나라에서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