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7. 00:33ㆍ카테고리 없음
내전을 수습한 쿠빌라이는 다시 송나라로 관심을 돌렸다. 송나라 정복은 자신이 떠맡은 역대 대칸들의 숙원사업일 뿐 아니라, 이를 완수한다면 아직도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는 몽골 내 경쟁세력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기도 했다.
그 사이 송의 수도 임안에서는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가사도가 독재 권력을 굳히고 있었다. 가사도는 재정을 긴축하고 통화개혁과 공전법을 실시했으며 부패한 장군들을 처벌하는 등 정치인으로서는 어느 정도 재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압도적인 적에게 맞설 지도력이 없었던 것은 물론,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쟁자인 장군들에게 권한을 넘길 용기조차 없었다. 가사도는 다음 전쟁의 양상도 과거와 똑같을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준비했다.
몽골 지도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송나라 침략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송나라는 요 금과 오랫동안 싸워오면서 주요 방어선인 회수와 양쯔강을 따라 성들을 지었다. 각 성의 방어력은 막강했지만 군대의 기동력이 사라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방어선의 한쪽이 돌파당하면 후방은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될 위험이 컸다.
몽골은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먼저 병력을 한곳으로만 집중해 공격하고, 전선 가까이 병참기지를 두어 전쟁이 길어지는데 대비하며, 수군을 육성해 강을 장악한다는 내용이었다. 쿠빌라이 칸이 어디를 공격할지 묻자 참모들은 이구동성으로 형주 땅 양양 즉 지금의 호북성 샹양을 지목했다.
1268년 드디어 몽골의 7만 대군이 양양으로 진격해 성을 포위했다. 양양성에서는 지역 군벌 여문환(呂文煥)이 자신의 정예병사 2만여 명과 수만 백성들을 독려하며 방어에 나섰다.
몽골군은 과거 조어성에서의 패전을 거울삼아 견고한 양양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외부 지원을 끊어 고사시키는 작전을 택했다.
송 조정도 양양성의 중요성을 알고 대규모 선단을 보내 필요한 물자를 지원했다. 그러나 물자를 하역하고 돌아가던 송나라 선단이 몽골 함대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제 강길마저 막힌 것이다.
가사도는 양양성을 구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포위 1년 반 만에 10만 명의 구원군을 편성해 보냈다. 몽골군도 역시 10만 명으로 증원해 기다리고 있었다.
양양에서 20km 떨어진 녹문산 부근에서 대전투가 벌어졌다. 송나라 병사들도 싸우겠다는 의지는 강했다. 그러나 상대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맞붙어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송나라군은 참패해 물러났다.
이제 구원군이 올 가능성은 사라졌다. 그래도 백성들은 여문환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버텼다. 계속 버티면 언젠가는 몽골군이 물러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양양성은 5년 넘게 홀로 버텼다.

그런데 양군의 대치 상황을 바꿀 새로운 무기가 등장했다. 몽골군은 중동 기술자들을 데려와 투석기를 만들었다. 무게 추를 이용하는 이 기계는 사람 힘으로 발사하는 중국식 투석기보다 훨씬 사정거리가 길었다.

몽골군은 양양성과 부교로 연결돼 있는 번성을 맹폭했다. 강 건너 언덕에 세워진 번성은 양양성과 상호 지원하는 방어의 핵심 시설이었다. 보름간의 사격으로 성벽이 무너지면서 마침내 번성이 함락됐다.
몽골군이 양양성 쪽으로 투석기를 옮기자 여문환은 투석기를 모방해 만들어 대응 사격했다. 위기는 모면했지만 성안의 병사와 백성들이 급격히 동요했다. 식량마저 떨어지고 상황은 점점 더 절망적이 되어갔다. 여문환은 매일 황제가 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쿠빌라이는 여문환에게 사신을 보내 “너는 헛된 공명을 바랄지 모르겠지만, 성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란 말인가?”라며 아프게 투항을 권고했다. 송나라 장수들마저 할 만큼 했다며 항복을 주장했다. 여문환은 백성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성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