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8. 00:34ㆍ카테고리 없음
송나라가 마침내 무릎을 꿇자 이제 다음 목표는 베트남이었다. 쿠빌라이 대칸이 젊은 시절 대리국을 정복하면서 화려한 군사 경력의 막을 열었기 때문에, 그때 고락을 같이 했던 운남 주둔군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군대가 베트남에서 겪은 패배를 쿠빌라이는 자신의 치욕으로 여겨 복수하고 싶어 했다.
그런 개인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몽골에게는 동남아시아로 정복지를 넓혀 갈 전진기지로서 베트남이 꼭 필요했다. 베트남을 속국으로 만든다면 열대지방의 기후와 지형에 익숙한 현지인들을 용병으로 징발할 수 있고, 바다에 서툰 몽골군의 약점을 베트남 수군으로 보완해 남중국해를 지배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몽골에 패할 경우 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전쟁도구로 내몰려 소모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민족의 존망을 걸고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베트남에서는 태종에서 성종, 다시 인종으로 왕위가 이어졌다. 또한 최고 실권자였던 쩐투도가 사망하고 그 후계자도 5년 만에 세상을 뜨자 권력의 축이 왕과 왕자들에게 완전히 옮겨갔다. 성종이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인종이 즉위하자 성종의 친동생 쩐꽝카이(陳光啓)가 최고대신인 태위가 되어 군과 정부를 장악하고 새 왕을 보위했다.
송나라가 멸망한 뒤 몽골의 2차 베트남 침입까지 6년간 양국은 첨예한 외교전을 펼쳤다. 베트남은 내부 역량을 기르는 한편 조공 외교를 통해 몽골의 침략을 피해 보려 애썼다.
몽골은 금, 은, 진주, 물소 뿔, 상아뿐 아니라 유학자와 의사, 점성가들까지 보내라고 요구했다. 베트남은 오만한 몽골 사신들의 비위를 맞추며 공납을 최대한 깎는 한편 베이징에 코끼리를 보내는 등 대칸의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그런데도 몽골은 공납 요구를 감당하기 힘들 만큼 높여가며 베트남을 압박해갔다.
몽골은 다루가치를 파견해 내정 간섭을 시도했지만 베트남의 반발로 실패했다. 몽골이 베트남 인종의 친조를 요구하자 베트남은 왕의 당숙인 쩐지아이를 대신 보냈다.
그러자 몽골은 쩐지아이를 왕으로 봉한 다음에 군대로 호위해 귀국시켰다. 국경에서 베트남군이 막아서면서 충돌이 벌어졌고 몽골군은 패해 물러나야 했다. 쩐지아이는 혼란 중에 겨우 탈출해 탕롱으로 귀환했다. 이제 두 나라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