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8. 20:38ㆍ카테고리 없음
몽골은 먼저 베트남 남쪽의 참파부터 공격했다. 몽골은 참파에 행중서성(行中書省) 즉 중앙정부기관인 중서성의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는 남해무역을 장악하고 장차 벌어질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병력을 차출하겠다는 의도였다. 베트남을 고립시키고 남북에서 동시에 공격하겠다는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멀쩡한 남의 나라에 지방관청을 설치했으니 참파가 두 눈을 뜨고 이를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인적 물적 수탈은 물론 자칫 국권까지 그대로 넘어갈 판국이었다. 하릿지 태자 등 참파의 강경파들이 몽골 관리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격분한 몽골은 즉시 원정군을 보냈다. 쿠빌라이는 송나라 정복에 공을 세우고 천주 성주로 봉해져 있던 소게투를 차출해 지휘를 맡겼다. 1282년 음력 12월, 350척의 배에 나눠 탄 만여 명의 몽골군이 참파의 수도 비자야 인근에 상륙했다.
사막에서 나고 자란 몽골군 병사들이 한 달이 넘는 항해로 기진맥진해 있었기 때문에 소게투는 일단 해안에 주둔지를 세우고 휴식을 취했다. 항복을 요구하는 몽골의 사신들이 참파 왕궁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성과를 기대하기보다는 시간 끌기 목적이었다.
그리고 상륙 약 4주 뒤 몽골군이 진영에서 나와 공격을 시작했다. 그동안 참파도 전투준비에 노력을 기울였다. 수도로 가는 길목에 야자나무들을 잘라 목책을 세우고 중동식 투석기도 1백 대 이상 만들어 배치했다. 궁수만 수천 명이었고 전투코끼리도 있었다.
그러나 야전에서 몽골군을 꺾을 군대는 당시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새벽에 몽골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는 정오쯤 되자 참파군에 대한 학살로 변해 있었다. 참파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몽골군은 여세를 몰아 비자야 성을 점령했다. 몽골군이 기대했던 전쟁 양상은 여기까지였다.
예상과는 달리 참파 국왕인 인드라바르만 5세와 하릿지 태자는 항복하는 대신 밀림 속으로 피신해 각지의 유격전을 지휘했다. 소게투는 참파군 지휘부를 잡으러 밀림 속으로 계속 군대를 투입했지만 낯선 지형 때문에 병력 손실만 누적됐다.
말라리아 등 열대 질병이 병사들을 위협했고, 해안에서 내륙까지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참파의 수도를 격파해 항복을 받겠다던 계획은 완전한 실패로 결론 내려졌다. 소게투는 다급히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참파로부터 급보를 전해 들은 쿠빌라이는 한족 병사 7천 명에 다른 피정복민족 병사 8천 명을 더해 지원부대를 만들어 파견했다. 그러나 이 충성심 없는 군대가 참파를 향해 출발하자마자 뿔뿔이 흩어지는 변고가 일어났다.
몽골 정부가 도주자들을 붙잡아 중형에 처하고 새로 병사들을 징집하면서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 사이 참파 원정군의 소게투는 견디다 못해 수도에서 물러나 북쪽 베트남과의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어렵사리 병사들을 다시 끌어모은 지원부대가 페르시아인 오마르가 이끄는 수군의 도움으로 참파의 수도 인근에 도착했지만 아군은 이미 떠난 뒤였다. 원정군을 찾아 다시 북쪽으로 항해하던 지원부대는 태풍을 만나 함선 대부분이 침몰하는 참사를 당했다.
오마르가 남은 함선들을 수습해 중국으로 되돌아갔고, 몽골은 결국 참파 정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게투의 원정군은 참파 국경지대 일부를 차지하고 농사까지 지으며 북쪽에서 벌어질 베트남 침략에 합류하기 위해 대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