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9. 00:22ㆍ카테고리 없음
몽골은 참파 침략 도중에 여러 차례 베트남에 사신을 보내 길을 빌려주고 군량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베트남은 참파가 멸망하면 자신들 역시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식량은 조공 형식으로 제공하겠지만 남진로는 열어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

1284년 말 중국 각지에서 무려 20만 명의 대병력이 베트남 접경 광서성으로 이동했다. 쿠빌라이의 아들 토곤이 이끌 이 군대에는 몽골족 정예병과 옛 금나라 땅에서 모은 북방민족 병사들, 옛 송나라 땅에서 징집한 조금은 덜 미더운 한족 병사들이 망라돼 있었다.
토곤은 다시 베트남에 참파로 가는 길을 열고 군량을 제공하라고 요구했지만 베트남의 대답은 똑같았다. 전쟁은 임박했고 전력의 열세는 불을 보듯 명확했다.
흉포한 적의 침략을 앞두고 민심이 흔들리자 인종은 전국의 덕망 있는 촌로들을 모았다. 그리고 저항과 항복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 물었다. 왕 앞에 선 모든 촌로들은 죽더라도 함께 싸우겠다고 대답했다.
베트남인들은 이를 연홍회의(延洪會議)라고 부르며 외세의 침입에 대한 저항정신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 연홍회의는 인조의 깊은 지혜와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이 결의를 통해 인조는 대몽항전이 왕과 귀족들만의 싸움이 아닌 나라의 존망을 건 백성 모두의 전쟁임을 각인시켰다.
인조는 삼촌인 쩐꽝카이 대신 전쟁영웅인 쩐꾸옥뚜언을 다시 불러 태위로 임명하고 군 통수권을 주었다. 쩐꾸옥뚜언은 왕족이었지만 왕실 가족이라 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는 왕실 내의 비극으로 인해 태상황 성종 및 쩐꽝카이와 아버지가 다른 형제여서 상당히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모든 정치적 이유보다 군사적 재능과 명성이 우선이었다. 국가 존망의 책임을 맡게 된 쩐꾸옥뚜언은 지도층의 단결부터 탄탄히 다지려 노력했다.
사서에 따르면 쩐꾸옥뚜언은 쩐꽝카이와 사이가 나빴다고 하는데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긴밀한 협력은 가장 어려웠던 몽골의 2차 침략 기간 동안 풍전등화 같던 나라의 운명을 구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인조는 마지막으로 문관인 장낫즈앙을 참파에 보내 양국의 오랜 원한을 풀고 동맹을 맺었다. 참파가 몽골군을 도울 가능성은 적었지만 관계를 미리 명확히 해두는 것이 베트남이 전략을 세우고 군대를 배치하는데 복잡한 변수를 줄여 주었다. 이제는 베트남도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