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9. 11:49ㆍ카테고리 없음
1284년 12월 토곤이 이끄는 몽골 주력군이 국경을 넘었다. 토곤의 육군은 베트남군의 저항을 뚫고 랑썬을 지나 반끼엡까지 진격했고, 그곳에서 바다와 강을 거슬러온 오마르의 수군과 합류했다.
쩐꾸옥두언은 두 부대의 합류를 막아보려 애를 썼지만 실패했고, 토곤과 오마르의 몽골군은 개전 한 달도 안 돼 수도 탕롱을 점령했다. 베트남 인조는 겨우 몸을 피해 작은 배를 타고 홍강을 따라 내려가 남쪽으로 피신했다.
토곤은 탕롱에 입성한 뒤 성에 남아있던 베트남 백성들을 학살하고 큰 잔치를 열어 승리를 자축했다. 중국 운남성에 주둔하던 몽골군도 나시루딘의 지휘에 따라 강줄기를 따라 남하하며 곳곳의 저항을 격파하고 탕롱성에 들어와 토곤 본대와 합류했다.
탕롱에서 퇴각한 베트남군은 남동쪽으로 70km 떨어진 남딘 지방에 재집결했다. 몽골군이 추격해오며 곳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베트남군은 다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 지휘관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쩐빈쫑이 몽골군에 포위돼 포로가 되었는데, 그의 용기에 감복한 몽골의 장군이 항복을 권했지만 거부했다.
몽골 장군이 “경은 북국의 왕자가 되고 싶지 않은가”라며 회유하자, 쩐빈쫑은 “나는 북국의 왕자가 되기보다 차라리 남국의 악귀가 되겠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대답하고 참수당하는 순간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쩐빈쫑은 본래 레 왕조의 후손이었는데, 태상황인 성종이 그의 인품과 용맹을 아끼어 왕족으로 입양했다. 쩐 왕조는 군 고위장교로 오직 왕족들만 임명했기 때문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왕족 입양이라는 편법을 종종 사용했다.
성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를 과부가 된 자신의 누이와 결혼까지 시켜 왕실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그러한 믿음에 쩐빈쫑은 죽는 순간까지 충성으로 보답한 것이다.
토곤은 참파 쪽에 머물러있던 소게투에게도 북상을 명령했다. 소게투의 군대는 응에안 지방은 거쳐 탕롱을 향해 진격했다. 쩐꾸옥뚜언은 태상황 성종의 동생이자 전임 태위였던 쩐꽝카이 등 여러 왕자들에게 사병을 이끌고 가 소게투의 진격을 저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성종의 또 다른 동생인 쩐익딱이 휘하 장수들을 데리고 소게투에게 투항하면서 남부전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쩐익딱은 훗날 원나라 수도로 가서 안남국왕으로 봉해졌으며 죽는 날까지 매국 행위를 계속했다.
또 쩐 왕조의 오랜 신하였던 레딱은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 지리를 총망라해 정리한 ⸀안남지략(安南志略)⌟을 지어 몽골군에 바쳤다. 일종의 침략 안내서였다. 서민과 노비들까지 일어나 나라를 지키겠다고 힘을 모으는데, 그동안 온갖 특혜를 누려온 왕족과 고위관리 가운데 배신자들이 나왔던 것이다.
절망에 빠진 인종은 항복까지도 고려했다. 인종은 자신의 여동생을 토곤에게 바치며 강화를 요청했는데, 토곤이 인종에게 직접 와서 항복하라고 요구해 협상은 소득 없이 끝났다.
그러나 다수의 베트남 군민은 저항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계속 적에게 저항하는 것은 백성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뿐이니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인종의 물음에, 쩐꾸옥뚜언은 이렇게 답했다. “폐하의 분부는 백성을 아끼는 군주로서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항복하시려면 그에 앞서 신의 머리를 베십시오. 신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