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수치

2021. 6. 23. 07:43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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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베트남 침략 실패는 몽골제국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겼다.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면서 이처럼 작은 나라에게 두 차례나 무참하게 패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연이은 패전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은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중단해야 할 정도로 막대했다.

 

베트남 몽골 전쟁 상상도
베트남 몽골 전쟁 상상도

원나라의 1차 베트남 침략이 실패한 직후인 1260년 지금의 팔레스타인 갈릴리에서 일한국의 몽골군이 이집트의 노예전사 집단인 맘루크 부대와 격돌해 참패했다. 이를 전장에 흐르던 시냇물의 이름을 따 아인잘루트 전투라고 부르는데, 이로써 몽골의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이 좌절됨은 물론 서진 자체가 멈췄다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아인잘루트 전투는 몽골군 병력이 1만 명밖에 안 됐다는 점에서 베트남 · 몽골 전쟁과는 규모를 비교할 수 없었다. 이집트군의 병력은 몽골군의 두 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일한국의 훌라구가 몽케 칸이 죽은 뒤 새로운 대칸 선출에 참가하기 위해 대다수 병력을 이끌고 몽골의 카라코룸으로 가고, 부하인 키트부가에게 일부 병력만은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키트부가는 기독교인 투르크족으로 뛰어난 장수이기는 했지만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창의력이 부족했다. 군대의 구성도 몽골군은 몽골족뿐 아니라 킵차크족과 타타르족 심지어 이제 막 정복된 아랍인 병사들까지 섞여 있었다. 반면에 이집트군은 이민족 청년을 노예로 구입해 오랜 세월 각종 전투기술을 가르친 맘루크들이며, 대부분 몽골과 같은 전술을 구사하는 투르크족 출신들이었다.

 

물론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공포의 몽골군에 맞선 그들의 분투와 전투 결과의 역사적 의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이집트군은 베트남군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에서 싸웠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훌라구가 돌아와 패전에 대한 복수를 시도했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킵차크한국의 베르케가 일한국의 후방을 공격해 실패했다. 그 뒤로도 이 같은 몽골 내부의 분쟁 때문에 일한국의 중동 공략에는 1,2만 명을 동원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베트남 침략처럼 수십만 명의 원정군을 파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다시 동아시아로 돌아오면, 몽골은 제국의 수치를 씻기 위해 3차 베트남 침략을 준비했다. 2차 침략에 실패한 직후 몽골의 추밀원은 쿠빌라이 대칸에게 베트남 정벌을 재개할 것을 요청했다. 몽골 전체의 뜻을 모으려는 쿠빌라이의 요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복수욕에도 불구하고 실제 군사행동에는 2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쿠빌라이는 카이두와의 내전을 마무리해야 했고, 베트남 침략 실패뿐 아니라 송나라 병합과 일본 원정 과정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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