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3차 베트남 침략 (1) 자만이 부른 패배

2021. 6. 24. 11:2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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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711월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몽골군은 베트남 국경을 다시 넘었다. 쿠빌라이의 아들 토곤이 이번에도 총사령관을 맡아 몽골족 정예군 7만 명을 지휘했다. 중국 운남성과 해남성에서 징발한 현지인 21천 명이 협공 부대를 편성했고, 아바치가 이끄는 1천 명의 돌격대가 선봉에 섰다.

 

그리고 오마르의 수군이 500척의 대선단으로 육군의 진격을 지원했다. 쿠빌라이는 역전의 노장인 아릭카이야, 나시루딘과 자신의 손자인 테무르까지 베트남 공격에 합류시키는 등 원정의 성공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몽골은 베트남의 청야(淸野) 전술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군량을 모두 바닷길로 운반해 간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이전 2차 침략 때부터 몽골은 군사전술에 큰 변화를 감수했다.

 

본래 군수품의 현지 조달이 몽골군의 기본 원칙이었다. 몽골은 기병들에게 최소한의 식량만 휴대하게 해 기동력을 극대화했으며, 보급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신속하게 이동해 목표를 공격했다. 이를 통해 그때까지 상상도 못했던 장거리 원정들을 성공시키며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런데 2차 베트남 침략 때 육상에 보급기지들을 건설했고, 그것이 게릴라 공격으로 제 기능을 못하자 이번에는 아무도 없는 바다로 군량을 나르기로 한 것이다. 몽골인들의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며, 또한 몽골이 베트남 정복을 위해 모든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몽골군은 2차 침략 때와 마찬가지로 육군을 둘로 나누어 1진은 중국 광서성에서 출발해 베트남의 국경도시 랑썬으로 향하고, 2진은 운남성에서 출발해 홍강을 따라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수군은 군량을 가득 실은 채 광동성을 출발했다.

 

토곤이 이끄는 몽골 주력군은 국경에 배치된 베트남군의 저항을 단기간에 일소한 뒤 랑썬을 거쳐 바익당강 하류인 반끼엡까지 밀고 내려왔다. 토곤은 여기서 일단 멈추어 수군을 기다렸다.

 

서전의 참패는 2차 대몽항전 승리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던 베트남에게 큰 충격이었다. 몽골군을 야전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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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닌성 꽝옌시 소재 쩐꾸옥뚜언 사당
꽝닌성 꽝옌시 소재 쩐꾸옥뚜언 사당

인종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쩐꾸옥뚜언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신상필벌의 원칙과 왕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 최고 지휘관이라도 법의 예외를 둘 수 없었다. 그러나 인종은 심리를 지연시켜, 쩐꾸옥뚜언의 군 재편성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군민 전체가 싸우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베트남 병사들은 팔에 '몽골군을 죽이자'는 뜻의 살달(殺韃)이라는 글자를 새겼는데, 몽골군이 이 문신을 한 포로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더욱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해 적에게 저항하고 만일의 경우 숲이나 산속에 숨었다가 다시 공격하자는 현수막이 마을마다 나붙었다. 군량미를 모두 태우고 후퇴한 쩐꾸옥뚜언이 지방의 부자들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했는데, 대가로 명목상의 관직밖에 주지 않았는데도 대다수가 적극 호응했다.

 

몽골과 베트남 모두 이제 총력전으로 맞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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