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락으로 새로운 출발

2021. 5. 9. 10:12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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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부에서 이동한 백월족의 한 무리가 베트남 북쪽 고지대에 정착해 어우비엣(Âu Việt, 甌越)을 세웠다. 어우비엣은 세력이 커지면서 반랑과 자주 싸움을 벌였다. 반랑의 18대 흥왕이 향락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자 어우비엣의 툭판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갔다. 나라를 빼앗긴 흥왕은 우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기원전 258년의 일이었다.

 

툭판은 현명한 지도자였다. 그는 반랑을 점령한 뒤 자신을 안즈엉왕(安陽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어우락(Âu Lạc, 甌駱)으로 정했다. 어우락은 어우비엣과 반랑 백성들을 일컫는 비엣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정복한 나라와 정복당한 나라가 차별 없이 하나로 융합되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안즈엉왕은 또 반랑 수도를 방문해 맹세의 돌에 참배하고, 옛 흥왕들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자신을 외부 침략자가 아닌 반랑 왕국의 계승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것은 어우비엣과 락비엣이 사실상 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면도 있었다. 어우락 때에도 반랑의 문신과 왼쪽에 단추를 달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등 습속이 그대로 이어졌다.

 

안즈엉왕은 반랑 족장들의 권한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했다. 땅을 빼앗아 어우비엣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일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반랑의 왕실을 제외하고 백성들의 삶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국가의 통합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안즈엉왕은 수도를 꼬롸(Cổ Loa, 古螺)로 옮겼다. 꼬롸는 지금의 하노이 시내 북부 동아잉 현이다. 반랑이 외적의 침입을 막기 쉬운 고원지대에 수도를 세운 데 비해, 어우락은 평야지대로 진출한 것이다. 그만큼 국력이 커졌으며 중국의 영향으로 성벽 축조 등 방어술이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어우락의 수도 꼬롸성 복원도
꼬롸성 복원도

꼬롸성은 높이 10m 외성 둘레가 8에 달했다. 학자들이 추정한 꼬롸성 조감도를 보면 맨 안쪽 점선이 왕궁이다. 왕궁과 귀족들의 거주지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그 성을 또다시 두 겹의 외성으로 보호했다. 성벽마다 앞에 깊은 해자 파 멀리서 보면 성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아직도 하노이 시 북부에는 군데군데 옛 꼬롸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 문명을 경험한 적이 없는 토착민들에게 꼬롸성은 충격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전설도 생겨났다. ‘성을 쌓는데 이상하게도 밤만 되면 무너져 내렸다. 근심에 쌓인 안즈엉왕이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렸더니 황금거북이 나타나 이유를 알려주었다. 반랑의 왕자가 한을 품고 저주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랑 왕자는 흰 닭이 되어 부근 비엔딴 산에 살고 있었다. 왕이 비엔딴 산에 가 흰 닭을 죽였더니 과연 보름도 안 돼 성을 다 쌓았다. 황금거북은 물로 돌아가면서 발톱 하나를 떼어 주며 쇠뇌를 만들라고 하였다. 안즈엉왕이 황금거북 발톱으로 만든 방아쇠틀을 활에 달자 신묘한 쇠뇌가 되었다. 이 쇠뇌는 한번 발사할 때마다 여러 발의 화살이 나갔다.’

 

활에 격발장치를 단 무기인 쇠뇌
쇠뇌는 활에 격발장치를 단 무기이다

전설에 나오는 흰 닭은 어우비엣에 끝까지 저항한 세력을, 황금거북은 협조한 세력을 의미할 것이다. 또 신묘한 쇠뇌란 새로 등장한 지배 집단이 가지고 온 우수한 무기를 상징한다. 중국에서 춘추전국시대의 치열한 전란을 겪으며 비약적인 전투기술의 발전을 경험했던 이주민 집단은 확실한 전력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즈엉왕의 지도 아래 어우락은 굳건한 토대를 다져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왕국은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북쪽에서 또다시 거대한 군사적 압력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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