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2. 08:24ㆍ카테고리 없음
육로로 퇴각하던 몽골군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베트남군의 매복 공격에 시달리던 토곤은 병력을 소규모로 산개해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유목민족 군대의 특기로 농경민족을 침략할 때 정규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싶으면 수십 명 단위로 흩어져 지나친 뒤 순식간에 다시 집결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 전술은 소규모 부대가 마주치는 현지 주민들이 싸울 능력과 의지가 없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몽골 병사들 앞에는 결사적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베트남 농민들이 있었다. 2차 대몽항전이 끝나고 몽골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호의를 침략과 학살로 되돌려 받은 베트남인들은 몽골 패잔병을 살려 보내지 말아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결국 몽골 육군 중 살아서 국경을 넘어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토곤은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했지만, 그를 맞는 분위기는 예상대로 싸늘했다. 분노한 쿠빌라이는 아들을 만나주지도 않고 수도에서 수천 리 떨어진 양주로 유배 보냈다.
침략군이 물러간 뒤 탕롱으로 돌아온 인종은 곧바로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베트남 사신은 토곤이 귀국한 지 바로 며칠 만에 원나라 수도 대도 즉 지금의 베이징에 도착해 조공을 바치며 원을 상국으로 받들겠다고 약속했다.
인종은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 전쟁에 대해 사과하고, “베트남은 덫에 갇힌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며 이해를 구했다. 쿠빌라이는 과거보다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왜 참파 공격로를 열어주지 않았느냐”고 질책한 뒤 오마르 등 붙잡혀 있는 몽골 장군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베트남 정부는 원나라 사신을 극진히 대접하고 오마르를 배에 태워 송환했는데, 중국으로 향하던 배가 도중에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베트남은 쿠빌라이에게 오마르를 구조하려 했지만 너무 무거워 실패했다고 해명했는데, 사실은 그를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쩐꾸옥뚜언의 진언에 따른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베트남과 원나라는 서로 전쟁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한때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직접 알현하라는 쿠빌라이의 요구를 인종이 병을 핑계로 거부하자 양국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쿠빌라이는 베트남이 사신을 보내는 족족 억류하고 또다시 베트남 정벌을 준비했다. 사실 쿠빌라이는 마음속으로 베트남 정복의 야심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 칭기즈칸 이후 계속된 정복 사업이 베트남에서 멈춰버린 것이 몽골제국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다고 여긴 것이다.
이 때문에 쿠빌라이는 1288년 5월 토곤이 패해 돌아왔는데 벌써 7월에 대규모 해상전투 훈련을 지시했을 정도였다. 원나라 대신들은 더 이상의 베트남 원정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황제의 의지 앞에서는 누구도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 1294년 쿠빌라이가 병으로 사망하자 출병은 취소되었다. 오랜 전쟁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쿠빌라이의 손자로 원의 황제 자리를 이은 테무르는 구금됐던 사신들을 석방하고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후 원나라는 왕조 말까지 베트남과 우호관계를 지속했다.
베트남은 본격적인 국가 재건에 나섰다. 무엇보다 무너진 제방과 황폐해진 간척지 등 농업생산시설 복구가 급선무였다. 또한 조국은 해방됐지만 오랜 전쟁에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인종은 전쟁 피해를 입은 지역의 조세를 면제해줬고, 정부가 나서 빈민 구제에 힘을 기울이도록 했다.
많은 것을 잃고 고통받은 시기였지만, 세 차례의 대몽항전을 통해 베트남은 안으로는 강화된 왕권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 밖으로는 동남아 군사강국의 위상을 떨쳐 대외관계의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기초로 베트남은 장기간의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