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왕으로는 부족하다

2021. 7. 5. 09:31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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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철옹성 같던 쩐 왕조의 통치체제도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이완되어갔다. 오랜 평화 속에 쩐 왕조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제5대 명종(明宗) 치세 말기부터 이미 망국의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노이 왕궁에서 발굴된 용무늬 벽돌
하노이 왕궁에서 발굴된 용무늬 벽돌

명종 자신은 백성의 질고를 근심하며 제왕의 도를 지키기 위해 일평생 노력한 왕이었다. 그는 기근이 발생하면 즉시 곳간을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세금을 감면했다. 강이 범람하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강가에 나가 제방 보강을 지휘하기도 했다. 국경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고 외적이 쳐들어오면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서 싸웠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사가들은 명종에게 국가를 이끌어 나갈 장기 비전과 역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박하게 평가한다. 겉으로는 번영하는 듯 보였던 왕조가 밑에서 썩어가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권력자들이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면서, 나라에 세금을 내고 부역과 군역을 담당할 인적자원이 부족해졌다. 불교계도 넓은 땅을 잠식하고 노비와 농노를 소유하며 타락해갔다. 여기에 왕실의 내분이 통치체제를 위에서부터 뒤흔들었다.

 

중전에게 아들이 없자 후궁들이 낳은 왕자들 가운데 후계자를 선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궁정 안에서 편을 나누어 격론이 벌어졌다. 후계자를 당장 정하자고 주장한 간신 쩐칵쭝(陳克終)은 시간을 두고 적자 탄생을 기다리자는 중전의 아버지 쩐꾸옥쩐(陳國瑱)을 모함해 옥사시켰다. 쩐꾸옥쩐이 과거 선왕인 영종(英宗)을 모시고 참파를 공격해 속국으로 만들었던 유능한 장수였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쩐 왕조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명종은 1329년 둘째아들 헌종(憲宗)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본인은 태상황이 되었다. 명종은 장남인 쩐둑(陳昱)을 엉성하고 미친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미워해 서인으로 내치고 차남을 후계자로 택했다. 실제로 쩐둑의 사려 없는 행동은 훗날 쩐씨 왕족 전체에 큰 화를 부른 불씨가 되었다.

 

즉위 당시 헌종의 나이는 11, 국정은 태상황 명종이 전담했고 헌종에게는 아무런 실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왕위를 지키던 헌종은 23살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월사기전서는 헌종이 총명함과 정의로움으로 백성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다고 기록했다. 그가 오래 살아 실제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쩐 왕조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헌종 치세 때 라오스와 참파 등 외적의 침입이 잦아졌다. 대규모 반격이 이어졌지만 전대와는 달리 베트남이 종종 패배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인도차이나에서 베트남이 더이상 무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명종이 직접 지휘했던 1335년 라오스 원정은 수많은 병사들을 잃고 참패로 끝났다. 베트남의 전력 약화는 대몽 항쟁 때 청년장교로 참전했던 유능한 장군들이 노쇠해져 이 시기에 잇따라 사망한데도 큰 원인이 있었다. 명장과 현신들이 사라진 자리를 무능하고 부패한 관리들이 차지해갔지만, 아집이 강해 인재의 옥석을 가리는 데 서툴렀던 명종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헌종 사후 태상황 명종은 자신의 열 번째 아들인 유종(裕宗)을 황제로 옹립했다. 당시 나이 6, 실권은 여전히 아버지 명종이 쥐고 있었다. 유종은 그저 먹고 노는 게 낙이고 일이었다.

 

문제는 명종이 사망한 뒤에도 21살의 젊은 왕이 여전히 주색과 사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종은 새 궁전에 호수와 동산을 만들어 그 안에서 술을 마시고 원나라에서 유입된 창극 뚜옹을 보거나 부자들을 모아 도박을 하며 모든 시간을 보냈다.

 

국정이 흔들리면서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곳곳에서 봉기했고, 남쪽에서는 참파의 세력이 무섭게 일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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