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한 베트남의 패배

2021. 7. 9. 07:47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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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의 포 비나수르는 베트남의 혼란을 지켜보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비록 승리했지만 1368년 베트남의 대반격을 경험한 포 비나수르의 공세는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간신히 목숨을 구한 즈엉녓레의 어머니 등 추종세력들이 참파로 달아나 쿠데타의 부당성을 호소하며 베트남 공격의 길 안내를 자청했다. 덕분에 포 비나수르는 국경지대가 아닌 베트남의 수도 탕롱을 직접 노릴 수 있게 되었다.

 

공격을 재개한 참파군은 1371년 배를 타고 베트남 북부에 상륙한 뒤 탕롱성을 공격했다. 잘 훈련된 참파군의 기세에 눌린 예종(藝宗)과 베트남 조정은 탕롱을 버리고 달아났다.

 

베트남 수도가 참파에 함락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참파군은 궁궐을 약탈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다. 참파군이 철수하자 예종은 슬그머니 탕롱으로 돌아왔다.

 

사태를 수습할 자신을 잃은 예종은 측근인 레뀌리와 도뜨빈에게 군대의 지휘를 맡겼다. 예종이 쿠데타를 할 때 가담했던 외척 레뀌리는 그저 평범한 수준의 전략가였고, 장군 도뜨빈은 훗날 매우 무능한 자로 판명이 났다.

 

예종(藝宗)1373년 동생 예종(睿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새 왕은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다.

 

몇 년간 병사를 기르고 군비를 갖춘 뒤 137612월 예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참파를 정벌하러 출정했다. 많은 신하들이 원정의 불리함을 들어 반대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베트남 중부 참파왕국 사원 유적 (사진 출처 Flicker)
베트남 중부 참파왕국 사원 유적 (사진 출처 Flicker)

참파가 바닷길로 탕롱을 직격했듯이 베트남군도 배로 이동해 참파의 수도 비자야 즉 오늘날 꾸이년 부근에 상륙했다. 격전을 예상했지만 해변은 고요했다.

 

예종은 정찰대를 풀어 부근을 수색했는데, 비자야 성까지 텅 비어 있었다. 붙잡힌 참파군 포로들은 포 비나수르와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정글로 달아났다고 자백했다. 자만에 빠진 예종과 베트남군 병사들은 당연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비자야 성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포 비나수르의 함정이었다. 베트남군은 숨어있던 참파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예종이 죽고 12만 베트남군도 거의 전멸했다.

 

함께 출정했던 레뀌리와 도뜨빈은 그 와중에도 목숨을 건졌다. 레뀌리는 보급품 수송 부대를 맡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후군(後軍)을 지휘하던 도뜨빈까지 포위당한 왕을 구하지 않고 달아난 것은 극형을 당해도 마땅한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탕롱으로 돌아와 계속 승승장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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