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7. 10. 06:18ㆍ카테고리 없음
태상황 예종은 전사한 왕의 둘째 아들 쩐히엔을 새 왕으로 즉위시켰다. 쩐히엔 역시 유약한 인물이어서 나라의 권력이 점점 신하들에게 넘어갔다.
쩐히엔은 비자야 전투에서 도망쳐 백의종군하고 있던 도뜨빈을 다시 중용해 군대의 모든 지휘권을 맡겼다. 그리고 참파의 침략에 대비한다며 조상들의 무덤을 파 부장품을 비밀 장소로 옮겼다.
이런 용렬한 지도부가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포 비나수르가 1377년과 1378년 연거푸 탕롱을 공격했을 때 베트남군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베트남의 수도가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세 번이나 참파군에 점령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포 비나수르가 베트남 공격의 목적을 약탈에서 정복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잇따른 원정의 승리로 참파의 영토는 계속 북쪽으로 넓어졌고, 반대로 베트남의 영토는 수백 년 전 응오꾸엔이 독립을 쟁취하던 때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주도권은 완전히 참파로 넘어갔고, 베트남은 국가의 존립마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레뀌리가 어렵게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1380년 포 비나수르가 홍강 삼각주의 턱밑인 타잉화까지 공격해 왔다. 부랴부랴 레뀌리가 이를 저지할 책임을 지고 출정했다.
레뀌리는 적과의 정면승부를 피하며 시간을 끄는 소극적인 전략을 선택했다. 포 비나수르는 보급선이 길어진 상태에서 베트남 영토 안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지자 군대를 돌려 퇴각했다.
적에게 타격 한 번 가하지 못하고 아군만 피해를 입었지만 그래도 베트남이 포 비나수르를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레뀌리는 일약 전쟁영웅으로 떠올랐고 그 힘으로 도뜨빈을 밀어내고 군 최고지휘관의 자리에 올랐다. 레뀌리는 1382년에도 부하인 응우옌다프엉의 분전으로 포 비나수르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기세가 오른 레뀌리가 함대를 동원해 참파를 공격하려다 태풍으로 병력만 잃은 채 회군했다. 이어 포 비나수르가 서부 고원지대를 통해 은밀히 이동해 탕롱 북쪽 홍강 유역에 나타나자 허를 찔린 베트남군은 우왕좌왕했다. 급히 부대를 편성해 참파군을 막으러 보냈지만 매복공격을 당해 대패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태상황인 예종은 참파군이 아직 탕롱 쪽으로 진격하기도 전에 허겁지겁 달아났다. 한 신하가 물에까지 들어가 배를 붙잡고 울며 백성들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했는데도 예종은 뿌리치고 강을 건너가 버렸다.
이번에도 응우옌다프엉이 얼마 안 되는 수비군과 백성들을 독려해 탕롱성을 겨우 지켜낼 수 있었다. 탕롱 점령에 실패한 포 비나수르는 무려 6개월 동안 홍강 삼각주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약탈한 뒤 돌아갔다.
베트남 백성들은 인도차이나 최강국에서 갑자기 주변국의 사냥감으로 전락해버린 현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참담한 상황을 「대월사기전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참파는 레왕조 리왕조 이래 병사는 많아도 겁이 많아서 우리 군대가 가면 가족을 데리고 도망치거나 울면서 항복했다. 그런데 쩨봉응아에 이르자 사람들을 모아 훈련시켜 점차 옛 습관을 버리고 용기와 인내심을 길러 침략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연이은 패전과 국가 위기 속에서도 정치적 혼란은 점점 더 깊어졌다. 쩐히엔 왕은 레뀌리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레뀌리가 먼저 움직였고, 태상황인 예종에게 쩐히엔 왕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설득해 폐위시키는데 성공했다.
국정 운영에 자신감을 잃은 예종은 오로지 레뀌리의 말만 믿고 따랐다. 레뀌리는 정부 안의 친왕파를 일소한데 이어 군(君)으로 강등된 쩐히엔에게 끝내 자살을 강요했다. 쩐히엔은 별도의 시호조차 정해지지 않아 이후 폐제(廢帝)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쩐히엔이 죽기 전 그에게 충성하는 장군들이 군대를 동원해 폐위를 번복시키려 하자 그가 막았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이라면 왕위를 되찾고 왕조를 지킬 기회를 스스로 버린 쩐히엔은 제왕의 자격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